성직자의 길. 더 이상 사람들을 위로할 수 없어요.
안녕하세요 상철 씨.
잘 지내셨나요? 오랜만에 상철 씨를 떠올리니 주로 입고 오셨던 짙은 흑청색 재킷에서 코끝으로 먹 향이 번지는 듯합니다. 굳은 입술에서는 수많은 말들이 가라앉은 듯 보였습니다. 마치 먹은 갈수록 사라지지만 벼루 위에 먹물은 진해지듯이 속으로 어떤 말을 묵히고 계셨지요. 마침내 침묵 속에서 끌어올린 단어들이 하나하나 묵직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히 아무말이 없어도 자연스러울 것 같았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순간과 영원. 상철 씨 같은 성직자는 순간을 영원처럼 살고 영원을 순간처럼 산다는 생각이 듭니다. 순간에 모든 것을 걸어 사랑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타인과 세상에 헌신하려는 사람들. 자기를 희생하더라도 남을 섬기고 보살피려는 사람들. 종교의 이념을 떠나서 성직자들이 공통되게 갖고 있는 마음이 이런 것 아닌지요. 성직자의 삶이란 끊임없이 자기를 낮추고 비워야 하는 삶이라는 생각이 먹을 떠올리게 했나 봅니다. 먹은 갈리더라도 먹의 향기는 점점 진해지듯이 말이지요.
많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만 상담실에서 마주했던 상철 씨의 모습은 성직자의 삶 그대로인 듯했습니다. 다만 어떤 고뇌가 한 사람을 짓누른 모습은 모든 내담자들이 보이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요. 그 고뇌가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게 어떤 향을 냈을 뿐. 더 이상 사람들을 위로할 수 없다는 상철 씨의 말을 들었을 때 고뇌 속에서도 은은한 향기가 났습니다. 흩트림 없는 눈빛과 자세는 오히려 더 깊은 고독이 있음을 말해주었습니다.
무엇이 상철 씨를 그토록 고독하게 했을까? 나름의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상철 씨가 남기는 침묵과 말의 향기를 좇아갔습니다. 표면적으로 가져온 문제는 종교 단체 내에서의 세력 다툼이었지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자기보다 남을 위해 살기로 일생을 건 사람의 신념이 그리 쉽게 흔들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직자의 신분으로 상담실을 찾기까지는 참 쉽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 정도의 흔들림은 외부의 갈등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세력 다툼이 상철 씨의 내면에 어떤 금이 가게 한 것인지 듣고자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들릴 듯 말 듯 그 속내는 잘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원래부터 조용한 분이 종교 수행으로 더욱 고요해진 듯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마음은 말마디에 조금씩 묻어날 뿐 그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외부의 포화가 쏟아지는 격전 속에서도 끄떡없는 무엇이 상철 씨의 내면에 버티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리 굴러도 오뚝오뚝 일어서는 오뚝이처럼 한결같은 올곧음이라고 느껴졌던 것이었지요. 하지만 거기에는 뭔가 더 있는 듯했습니다. 말보다는 상철 씨의 몸짓과 자세, 태도에서 점차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겉으로 감지되는 것들을 통해서 말이지요. 때로는 내용보다 외형이 더 진실하기도 합니다.
어떤 외풍이 불어도 중심을 잡을 수 있는 돛단배. 하지만 그건 장식용 스노우돔처럼 외부가 철저히 차단된 모형 속에 갇힌 돛단배였습니다. 그 돛단배가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것은 애초에 절대 침몰할 수 없게 설계된 것이니까요. 사실 사각 플라스틱에 갇힌 그 배에게 외풍이란 없으며 바깥에서 흔들어대는 인위적인 요동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흔들리지만 완전히 흔들릴 수는 없는 배. 플라스틱 직육면체의 안전한 틀 안에서 흔들리고 있는 모형. 배라는 것이 본디 한 자리에 중심을 잡고 묶여 있기 위함은 아닐 텐데. 멀리 멀리 항해를 떠나고 싶을 텐데. 자기의 소명을 다해 힘껏 바다를 가르고 싶지 않을까. 이런 머릿속 이야기를 접어두고 상철 씨가 전진하는 속도를 맞추느라 다소 애를 먹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완고하고 완벽한 틀 안의 출렁임도 출렁임이어서 그런지 상철 씨도 금이 간 마음을 내면에 담아두고만 있을 수는 없었나 봅니다. 종교 단체의 갈등은 아름답지는 않을지언정 어떻게든 마무리되어 가는데 상철 씨의 내면은 수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요. 표면상의 이유로 상담을 찾아온 게 정말 맞는다면 외부의 사건이 진정되어가면서 내면도 안정을 찾았어야 했을 텐데요. 외부 사태가 안정됨에 따라 오히려 흔들림이 심해졌던 상철 씨의 내면은 진정 갈등이 외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봉합되지 않은 갈등은 원래부터 내면 깊은 곳에 있었던 것이라고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어느 날 우리가 함께 있으면서도 함께 있지는 않은 것 같다는 상담자의 자기 개방에 뭔가를 들킨 듯 무척 놀랐던 눈빛. 그 눈빛에 한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그 순간 거부할 수 없는 진실함이 오고갔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상철 씨가 일생 갈고닦은 수행의 도량이 상담자의 말을 받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고요히 관조하는 진실함 속에 우리는 그제야 다 풀어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함께 풀어낼 수 있었지요.
성직자의 길을 갔다가 환속해 연약한 생활력을 가졌던 아버지, 감정을 받아주기보다는 아버지 대신 가계를 꾸리느라 억척같았던 어머니 아래 자라면서 나름대로 강인한 사람이 되려고 무지 애를 쓰면 살아오셨다고 했지요. 누구에게도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한 사람. 어떤 감정에도 흔들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온 한 사람. 결국 신적인 존재만이 나를 알아줄 것이라 생각하고 분풀이하듯 종교에 귀의했던 한 사람. 그가 어떤 청년 시절을 보냈을지 떠올리자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마침내 하늘이든 신이든 운명이든 가늠할 수 없는 그 무엇과 싸우기 위해서 일생을 걸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상철 씨의 깊은 고뇌가 무엇인지 비로소 조금 더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참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우리는 자기 고뇌의 정체를 분명히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한결 가볍게 삶을 이어갑니다. 상철 씨도 그 고뇌의 시작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알게 된 것만으로도 알 수 없이 짓눌려 있었던 무게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요. 깊은 고뇌를 가진 나를 신이라는 존재만큼은 안아줄 수 있지 않을까 했던 낡은 희망을 고백하면서 말이지요. 뜻밖에도 그 고백의 장소는 종교와는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세속의 상담소였습니다. 사람들이 다들 자기만의 이유와 사연으로 울고 웃다가 가는 그런 곳 말입니다. 그래서 저잣거리에서 되찾은 내 삶의 이야기가 상철 씨에게는 더욱 희망적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자기가 선택했던 고통이라는 것을 분명히 직시할 수 있었던 용기. 그것은 또한 역설적이게도 세상과의 단절을 통해서 키운 고독한 기품 속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상철 씨의 방식이었지요. 위태로웠던 수도 생활을 다시 균형 잡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용기 덕분일 테지요. 상담 마무리 즈음 환속과 더 깊은 귀의 사이에 균형을 찾는 상철 씨의 모습에서 앞으로의 수도에 더 깊고 진한 향기가 밸 것 같았습니다. 함께 한 상담을 통해 새로운 선택이 없어도 삶은 새로워질 수 있음을 저 또한 다시 배웠습니다. 우리가 함께 한 상담은 수도의 다른 방식이 아니었을까요?
나중에 우연히 다시 만난 자리에서 행복하게 웃던 상철 씨. 더 이상 사람들을 위로하려고 애쓰며 살지 않는다고 하셨지요. 이어서 하신 말씀이 참 인상 깊이 남아 있습니다. ‘내 고뇌를 내려놓으니 신이 어느새 저를 안고 있더라고요.’ 제가 기억하는 상철 씨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함께 나눈 옛 기억을 꺼내니 티 없이 맑게 갈린 먹이 잔잔히 울리는 듯합니다. 묵향천리 덕향만리(墨香千里 德香萬里). 아무 말도 없이 먹의 향기는 천 리를 가고 사람의 덕의 향기는 만 리를 가고도 남는다고 하지요. 돛을 달고 항해를 떠나지 않아도 향은 가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바람이 불면 제자리를 지키고서 향은 멀리 멀리 퍼질 테지요. 상철 씨 내면의 은근한 향기가 세상 곳곳에 퍼지길 함께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언젠가 더 깊은 향으로 이곳에도 다다르기를 소망합니다.
▼ 상철 씨와의 상담 사례는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