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사인 내담자가 쓴 편지
심리상담사에게 성공은 무엇인가요?
요새 부쩍 성공하고 싶다는 내담자들을 많이 만나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대부분이 이미 돈을 많이 벌고 있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 중에는 흔히 말하는 ‘사’자 직업이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탄탄한 사람들이 많아요. 그들이 여전히 성공을 탐하다니. 그들이 원하는 성공은 무엇일까. 경제력으로 보나 사회적 영향력으로 보나 그들보다 한참 뒤떨어지는 심리상담사는 삶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얻어야 성공하는 걸까요?
성공하려는 사람들 이야기가 귀에 들리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그런 사람들이 지천에 널린 듯 자주 보여요. 다들 어디 숨어 있다가 나왔는지 저에게도 이제 그만 ‘성공’하라고 떠듭니다.
우연히 친분이 생긴 한 사람이 초대해서 그의 친목 모임에 따라간 적이 있어요. 알고 보니 일반 사람들은 다단계라 부르고 전문가들은 네트워크 마케팅이라고 부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때 그곳의 분위기란. 그곳을 묘사하라고 하면 지금도 적당한 말을 찾기가 어려워요. 상담사의 세계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세상이었어요. 다들 행복해보였거든요. 사는 게 어렵다는 이야기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 자리였지요. 맨날 의자에 앉아서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죠?’라는 이야기를 듣는 상담사에게 그곳은 이제 막 발견한 엘도라도처럼 느껴졌어요. 고급스러운 응접실, 눈부신 조명, 비싸 보이는 식기류, 풍성한 음식들, 잘 차려입은 사람들, 건설적이고 발전적인 대화. 그곳에는 성공의 장식들이 넘쳤어요.
사회적으로도 잘나가는 그들은 계속 성공에 대해 이야기하더라고요. 물론 어떤 사람은 아주 높은 등급이었고, 어떤 사람은 이 바닥에 뛰어든 지 얼마 안 돼서 앞선 사람을 흠모하는 등급이었어요. 그래서인지 아주 높은 등급인 사람의 이야기를 나머지 사람들이 경청하는 모습도 보였어요. 어떻게 하면 그것이 –다이아몬드인지 티타늄인지- 될 수 있는가? 성공에 대한 진지하고 열띤 이야기. 이야기를 듣다가 내가 성공에 대해 이들처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성공이라는 단어조차 낯설어 하더라고요. 성공의 카오스. 성공이 뭔지도 모르겠고 이래 가지고 성공은 그를 것이라는 자기반성도 들고. 너무 많은 깨우침에 혼란스러웠어요. 왠지 계속 거기 있으면 안 될 거 같은 소외감도 들었고요. 얼른 이 시간이 무사히 끝나고 성공적으로 자리를 뜰 수 있기를 기도했어요.
드디어 모임 시간이 끝나고 다들 헤어지는 자리, 제 또래의 한 사람이 다가와서 이런 인사말을 했어요. ‘정상에서 만납시다.’ 아주 자연스럽게 어떤 스스럼도 없이. 으스대거나 잘난 체하는 기색도 전혀 없이. 상당히 신선한 말이었어요. 아시다시피 심리상담사들은 자기를 좀 심하게 낮추는 데 특화되어 있잖아요. 그런 무리에 둘러싸여 사는 저에게는 특히 신선하고 생경하게 느껴졌어요. 그의 선뜻한 말과 태도에 살짝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그러자고 대답했어요. 그때 ‘그냥 아무 데서나 언제든 웃으며 만납시다.’라고 했으면 참 멋있었을 거 같은데. 왜 그런 생각은 뒤돌아서면 나는 걸까요? 아무러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을 때 이미 저는 진 거예요. 그 사람처럼 어떤 스스럼도 으스댐도 없이 정말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을까. 그 순간 약간 어벙하게 보였을 제 모습이 아쉽네요. 집에 돌아와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어요. 심리상담사가 정상에 서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이 질문은 왜 심리상담사가 되었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어요. 심리상담사가 돼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인가. 먹고사는 일로 치면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이 일을 왜 나는 굳이 택했는가. 그들이 던져 준 성공의 카오스 덕분에 많은 것을 되돌아 볼 수 있었어요. 처음에 심리상담사의 길을 택했던 이유 중 하나. 그건 한 단어로 표현하면 活이에요. 살게 하는 것.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 생기 있게 하는 것. 삶이 신명나게 하는 것.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던지자. 이 마지막 말은 제 20대의 표어이기도 해요.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에 나오는 문장이지요.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음. 다단계 모임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주님으로 시작하는 기도문을 적으니 더욱 숙연해지네요. 20대의 한 시절에 충실히 따르고자 마음에 되새겼던 기도문이에요. 한두 문장만 인용하려고 했더니 어디서 어떻게 자를 수가 없이 전체가 한 문장처럼 완결되어 있네요. 그때 그 시절 제 마음도 다시 떠올리고 싶어서 전문을 적어 봅니다. 이 문구들에 담긴 제 진심 한 톨을 선생님이 알아주시면 좋겠어요.
마지막 문장의 종교적인 영생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실 뭐 잘 모르겠고요. 다만 특정 신에 대한 관념을 제한다고 해도 이 기도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했어요. 20대의 설익었던 청춘 시절에도 말이에요. 인류의 보편적인 가르침이라 할 만하다고 생각했던 거죠.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사랑하기보다는 사랑할 수 있다면. 자기를 버리고 비운 뒤 나로 가득했던 그 자리에 타인과 세상을 담을 수 있다면.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생명을 보존하고 기르는 일을 할 수만 있다면! 여전히 말만 앞설 뿐이지만 그리 살고 싶은 진실한 충동이 이제 막 잉태된 아기의 약하지만 또렷한 심장박동처럼 그때부터 뛰고 있었답니다.
이 기도문을 지금 다시 적고 읽으면서 세파에 찌들어 점점 흐릿해지는 그 심장박동을 다시 키워 보아요. 活. 무엇을 살리고 싶었던 것일까. 타인을 어떤 식으로든 살리고 싶다는 마음은 사실 저 자신을 살리고 싶은 강한 충동에서 비롯된 거예요. 청춘답지 않게 시들어가는 그 청춘을 심폐소생하고 싶었던 거예요. 실의와 낙담에 빠져 있던 그 청춘. 그때 그 사람은 성공의 정반대 편에 서 있었어요. 성공의 기미는커녕 희미한 희망이라도 붙잡으려고 속으로 안간힘을 쓰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 기도문에서 두 문구가 특히 와 닿았어요.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나에게도 가져오고 타인에게도 가져오고 싶다. 삶이 진실로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고 싶다. 나 자신의 삶도 다른 이의 삶도 다시 소생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마음이었지요.
어둠과 절망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더라고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삶이 계속된다는 건 참 좋은 거예요. 어둠과 절망은 고정된 시점, 고정된 생각 속에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 끝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영원한 어둠과 절망은 있을 수 없지요. 제 청춘이 그렇게 흘러갔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마땅히 하는 것도 없이 그냥 시간의 흐름에 맡겨두고 있었지요. 지금 돌아보면 조금만 더 삶의 흐름에 맡겨보았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해요. 조금 더 용감하게 방황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적어도 돈이 됐든 마음이 됐든 걱정하는 게 주업인 심리상담사는 안 되지 않을까. 이제 와서는 실없는 생각이지만 그 시절 나에게 말하고 싶어요. 동시에 저의 그때와 비슷한 방황을 하고 있는 청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이미 방황하고 있다면 그 방황, 조금 더 철저하게 용맹스럽게 해 보세요. 자기 자신을 믿어도 돼요. 그 방황도 온전히 자기 것이 되도록. 훗날 미련 없는 방황이 되도록. 방황의 길을 끝까지 완주해 보세요.
제가 아쉬운 지점이 바로 그 부분이에요.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