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 일지 6. 결정 후

심리상담사인 내담자가 쓴 편지

by 나무둘

그럴 줄 알았어요. 과연 선생님다운 말씀이셨죠.

‘결정을 내리든 안 내리든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인생은 가만 두어도 흘러갈 텐데요.’ 그냥 한 번쯤 제 장단에 함께 얼씨구나 지화자 해 주시면 좋을 텐데. 하긴 선생님이 그런 식이었다면 제가 굳이 상담을 찾아가지도 않겠죠. 차라리 죽이 맞는 친구들이랑 유사 상담 행위를 하겠지요. 그 회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 보았어요. 제 생각을 나누어 볼게요.


제가 좋아하는 티베트 스님이 있어요. 그 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결정이 뭐가 중요한가요? 이쪽을 선택하든 저쪽을 선택하든 달라질 게 없습니다.’ 도에 통달한 스님이라서 이런 말씀을 하실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진실이 담겨 있어요.


첫 번째 진실은 우리의 평소 정신 상태가 원래 좀 이상하다는 거예요. 우리가 일반적이라고 여기는 평상시 정신 상태를 명상과 수행을 오래한 분들은 약간 정신이 나가있는 상태라고 보는 거지요. 일종의 신경과민 상태라고요. 스님이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 Default Mode Network에 대해서 아시는지 모르겠으나 뇌 과학에서도 동일한 이야기를 하지요. 평소에 너는 제 정신이 아니니라.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가 과활성화된 뇌 상태는 생각의 더미에 쓸려 다니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요. 스마트폰과 한 몸이 되어 매우 산만하게 사는 현대인에게는 참 지당한 말씀입니다. 이미 뇌의 초깃값(default)이 엉망인 상태로 사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래서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무엇을 잘 결정한다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거죠. 표현을 순화해서 그렇지 스님은 사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거예요. ‘우리는 평소에 다 미쳐 있답니다. 전부 다.’ 득도의 관점에서 깨닫지 못한 마음은 미친 마음이니까요. 미친 정신으로 중대한 결정을 한다고 하니 이쪽을 선택하든 저쪽을 선택하든 달라질 게 없다고 말씀하신 거겠지요.


두 번째 진실은 정말 중요한 것은 선택이 아니라 결정하고 선택한 이후의 행동이라는 거예요. 무엇을 선택하든 선택에는 결과가 뒤따르잖아요. 불교에서는 그것을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업보라고 부르며 중요시 여기고요. 선택과 동시에 결과가 곧바로 시작되니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이 보다 중요한 거예요. 결정은 한 순간에 끝나지만 그에 따른 결과는 장시간 지속되니까요.


그래서 스님 말씀이 결정은 가볍게 하래요. 아무렇게나 결정해도 상관없대요.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인생이고 불교적 관점에서 인생은 번개같이 이슬같이 사라지는 것이니. 흠. 스님의 경지가 아니라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말씀만 들어도 결정 자체는 생각보다 중요한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요. 어쨌든 결정이 가벼운 것이라면 결정 이후는 좀 더 무겁게 살라는 듯해요. 무엇을 선택하든 그 선택에 최선을 다하라고요. 결정을 하기까지는 머릿속 알음알이를 굴리는 거라 진짜 삶은 아니잖아요. 결정을 한 후에 내가 벌인 사태를 스스로 헤쳐 나가는 것이 진짜 삶이니까요. 지극히 현실적인 이 삶을 살라고, 바로 여기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불교에서 멀리 서쪽에 있다고 말하는 이상적인 극락세계)를 스스로 만들어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자기 삶, 자기 결정에 대해 책임을 다하는 것.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 길만이 유일하게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길이에요. 온전히 자기 삶을 다 끌어안는 거죠. 성공이든 실패든 내가 살아가며 만들어 낸 모든 결과를 기꺼이 끌어안는 사람을 구속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을 거예요.


은퇴를 앞두신 원로 선생님의 상담사례 교육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네요. 그때 그 원로 선생님은 이럴 땐 어떡하나 저럴 땐 어떡하나 계속해서 묻는 제자 상담사들께 지쳤는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나? 자기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지.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상담실과 함께 작은 서점을 운영하고 있잖아요. 서점이 작은 공간이라서 찾아온 분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때 흔히 듣게 되는 질문 중 하나가 이거예요. ‘저에게 맞는 책 추천해주세요.’ 참 두려운 질문이지요. 어떤 책을 추천하든 잘해야 본전이기 때문이에요.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비장하게 책을 추천해봐야 대부분의 경우 과녁에 명중하기 힘들어요. 그럼 맛도 별로인데 후미지기까지 한 골목식당이 되는 거잖아요. 정말 운이 좋으면 내 맘을 꼭 맞게 알아주는 숨은 맛집이 되는 거지만. 그건 로또보다 조금 높은 확률이 아닐까 싶어요. 잠깐 몇 마디 나눈 대화로 자기의 취향을 파악해 책을 골라 달라는 낌새가 보이면 슬슬 자리를 피하고 싶어져요. 처음 보는 사람의 취향을 저격하는 것은 참말로 어려운 일인 데다가 그 결정에 대한 책임까지 떠맡고 싶지 않거든요. 저도 원로 선생님의 멘트를 따라하고 싶어요. 그걸 왜 저한테 물어봐요? 자기 책은 자기가 알아서 사는 거지요. 그렇지만 지금은 차마 이렇게 말하기 어렵고요. 제가 나중에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되면 이렇게 말하겠어요. ‘사랑하는 지구별 손님, 자기 책은 자기가 고르는 거랍니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거지요. 쓰든 달든 자기 멋대로 결정해서 그 맛을 보는 게 인생이라우.’


여기까지 쓰고 보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어요. 아마 선생님도 동의하실 거 같은데요. 편지 내용을 정리해 선생님 질문에 간단히 답하자면 이렇게 돼요.


결정은 가볍게.

실천은 묵직하게.


이렇게 사는 게 나 자신을 가장 존중하는 삶의 방식이 될 거라 생각해요. 이 뜻을 담아 저 자신을 위해 마음 모아 기도해요. 지금까지의 삶의 결과를 기쁘게 받아내는 내가 되길. 선생님의 돌직구도 거뜬히 받아내는 내가 되길. 가슴이 뜨끈 달아오르네요. 제 마음의 글러브를 키우러 다음 상담에도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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