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사인 내담자가 쓴 편지
상담 받는다고 마음에 든 멍이 풀려요?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어요. 선생님의 대답은 무엇인가요? 내담자가 이렇게 물었을 때 저는 대답하지 못했어요.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심리상담 효과가 어떻다느니 아무 말이나 할 수는 있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자기 속을 숨김없이 빤히 드러내는 분 앞에서 상담사는 솔직해야했어요. 최근 근무 현장에서 절친한 지인을 잃어 삶에 속수무책인 느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분께는 더더욱 솔직하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이런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은 무엇일까요? 상담이 마음에 든 멍을 풀게 하는 게 아니라면 상담은 무엇인가요? 마음에 든 멍을 풀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며칠 전 초등학교 저학년인 아이가 흔히 말하듯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 학교에서 돌아왔어요. 우리 애지만 정말 한쪽 눈이 팬더곰 같았어요. 눈 주위가 시퍼렇게 멍들어서 어디서 제대로 맞았나 하는 생각이 대번에 들었지요. 아이에게 물었더니 학교에서 달리다가 다른 사람과 부딪쳤다고 하더라고요. 씩씩하게 웃으면서 말이지요. 그 모습을 보며 약간 어이가 없었어요. 왜 안 울지? 담임선생님을 통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아보니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애랑 부딪친 게 맞고, 부딪쳤을 때 조금도 울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부딪친 직후에는 가던 방향으로 계속 달려갔대요. 조금도 울지 않았다? 집에서 작은 일에도 짜증내며 울던 아이는 어디 갔지?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어요. 역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맞구나. 고개를 주억였어요. 아이한테 물어보았어요.
“아프지 않았어?”
“아니, 하나도 안 아팠어. 지금도 안 아파.”
“거짓말.”
“아니 진짜야.”
“거 참 이상하네. 울고 싶은데 참았지?”
“아니. 눈물 한 방울도 안 났어.”
일말의 시크함도 없이 힘을 줘서 아무렇지 않다고 얘기하더라고요. 몇 번에 걸쳐 괜히 아파해도 된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팩트 체크를 해보았지만 정말 아프지 않았고 지금도 아프지 않다고 했어요. 마치 뭐 그런 걸 자꾸 물어보냐는 투로 해맑게 웃으면서. 오히려 여러 번 물어보는 아빠라는 인간은 참 신기한 인간이라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아이가 슈퍼맨처럼 보였어요. 참 신기한 일이지요. 나라면 무지 아팠을 거 같은데.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아이는 거실에서 낄낄거리며 놀고 있어요. 눈탱이는 여전히 밤탱이인 채로.
아이를 보면서 생각했어요. 시퍼런 멍이 들어도 웃을 수 있구나. 멍이 들든 말든 아무렇지도 않게 웃을 수도 있구나. 아이가 인생의 스승이라더니 정말 그래요. 저라면 시퍼런 멍이 들었을 때 울거나 화를 냈을 거예요. 그리고 자꾸 멍 자국과 붓기를 확인하면서 언제 다 사라지려나 생각하며 자꾸 거울을 쳐다봤겠지요. 가능한 한 멍을 가리기 위해서 고개를 숙이고 다니거나 모자를 눌러 썼을지도 몰라요. 당연히 얼굴을 당당히 들고 해맑게 웃는 짓은 안 했을 거예요. 그랬다가는 내 얼굴에 멍이 있다고 동네방네 자랑하는 꼴이니까요. 나는 멍든 사람이고 아픈 사람이니까요. 그런 나를 감추어야 하죠. 가능하면 이런 고통의 흔적이 남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해요. 멍든 것도 속상한데 멍든 것을 남들이 알면 더 속상할 거예요. 상처란 애초에 꽁꽁 싸매는 게 정석이잖아요. 우리 어른들의 세계에서 상처는 감추라고 있는 것이지 드러내라고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세상에. 내가 만일 눈에 멍이 들었다면 어떻게 하고 다녔을지 상상해봤더니 아이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는 멍에 대해 자꾸 묻는 제가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봤어요. 멍이 든 걸 자꾸 쳐다보고 이야기하면 껌이 나오냐 초콜릿이 나오냐. 아니면 장난감이라도 사 주든가. 저한테 이렇게 반문하는 듯했어요. 아이들의 세계란 참 오묘한 것이지요. 그들은 배우지 않아도 고통을 어른들보다 어른스럽게 다룰 줄 알아요.
아이와 문답을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어요. 고통에 주목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닐 수도 있겠네. 자연이 치유하는 동안 그 상태로도 즐겁게 지낼 줄 아는 것이 우리의 선천적인 능력일 거야. 원래는 고통을 그렇게 고통스럽게 되씹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생명 활동인 거야. 어쩌면 우리는 고통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도록 훈련되어 온 것 같아요.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고통을 그런 식으로 다루라고 은연중에 배우죠. 아이가 걷다가 돌부리에 넘어져서 울면 괜히 그 돌부리를 타박하잖아요. 누가 그랬어? 이 못된 돌. 응, 저게 왜 튀어나와 있어 가지고. 저게 잘못했네. 때찌 때찌. 괜찮아 괜찮아.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 and you?’처럼 알고 있는 공식이죠.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전래동화처럼 흔히 들어온 그 소리. 엄마의 선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말은 사실 고통을 가중하는 말이에요. 고통에 주목하게 하고 고통을 연장시키는 역효과를 내고 있는 거죠. 아이는 속으로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을지 몰라요. 난 이제 괜찮은데 엄마는 왜 이렇게 호들갑이지? 엄마가 저렇게까지 하는데 갑자기 너무 괜찮아 보이면 안 되겠지? 엄마가 저러니까 더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여기서 적절한 반응은 무엇일까? 왠지 계속 더 울어야 할 것 같아. 더 울자. 엉엉.
예전에 상담사례 회의에서 수퍼바이저 선생님이 한 말씀이 생각나요.
‘우는 게 능사일까요?'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