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 일지 9. 시간①

심리상담사인 내담자가 쓴 편지

by 나무둘

‘시간’이라 쓰고 ‘사랑’이라고 읽습니다. 이 시간 저는 결국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 거 같거든요. 왜 시간 이야기가 사랑 이야기가 되는지 지금부터 들려 드릴게요. 제 설(舌)이 잘 풀리도록 입 안에 사탕 대신 사랑을 물고 시작합니다.


바야흐로 상담 센터를 처음 열려고 준비할 때였어요. 여러 할 일이 있었지만 그 중에 하나는 홈페이지를 만드는 거였어요. 홈페이지 제작을 업체에 맡기고 싶지는 않았어요. 혼자서도 만들 수 있다고 듣기도 했고 홈페이지라는 건 인터넷 상의 내 얼굴과도 같으니 이왕이면 손때를 묻혀 직접 해보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터라 인터넷에서 하나하나 전부 검색하면서 매일 밤늦게까지 홈페이지를 만들고 있었지요. 문제 하나를 해결하면 그로 인해 다른 문제 하나가 생기는 등 작업은 끝이 안 보였어요. 며칠 밤낮으로 홈페이지만 붙들고 있던 그때. 마음은 점점 팍팍해져 돌을 씹는 심정으로 키보드를 쳐댔지요.


작업은 더뎌 어느 세월에 뭐가 되려는지 전혀 감은 안 오고. 일단 시작은 했으니 끝은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고. Homepage의 ‘h’도 모르면서 덤벼든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시간은 왜 이리 빨리 가는지. 아는 게 없으니까 전문가가 10분이면 해결할 문제를 3시간은 혼자 끙끙거렸을 거예요. 아이가 어려 밤에는 꼭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잠들고 싶었는데 머릿속은 온통 홈페이지 제작과 관련된 것들로 가득해서 하루 종일 컴퓨터 앞을 좀처럼 떠나지 못했어요.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그때, 시간을 자각하게 하는 일이 매일 밤 아홉 시쯤 일어났어요. 그 시간까지 컴퓨터에 붙어 있으면 이제 제법 말할 줄 아는 아이가 잠자는 방에서 다다다다 뛰어와서 말을 걸곤 했거든요.


“또 왔어.”

“응. 아빠 이거하고 금방 갈게. 가서 기다려.”


그러고는 아이를 꼭 끌어안고 잠자는 방에 데려다 놓았지요.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잠시 뒤에 아이가 또 다다다다 달려와서 말했어요. 또 왔어. 그 말과 눈빛이 어찌나 귀엽던지. 그런 사랑스러운 실랑이를 매일 열댓 번씩은 했을 거예요.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그 갈등의 시간. 가서 아이랑 함께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데. 그런데 아까 그 문제는 저런 코드로 바꾸면 해결되지 않을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어요. 그러면서도 마음에는 경종이 울렸지요. 아이와 보내는 이 시간이 다시는 오지 않을 거야. 지금처럼 이 시간을 보내면 나중에 후회할 걸. 컴퓨터 앞에서 코드를 수정하는 와중에도 아이의 ‘또 왔어’가 생각났어요. 자괴감이 들더라고요. 멈추지도 못하고 더 나아가지도 못하는 상태.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제발 시간이 멈추기를 바랐어요. 이대로 잠시 멈출 수는 없겠니? 시간아. 제발.


결국 시간도 멈추지 못하고 저 자신도 멈추지 못했어요. 이제 그만 컴퓨터를 끄고 아이와 잠자리에 들라는 ‘또 왔어’가 계속 머릿속으로 침투했지만 멈추지 못했어요. 기어이 몇날 며칠 애를 써서 만든 홈페이지. 완성된 홈페이지를 보면서 뿌듯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허탈하기도 했어요. 내가 이걸 만들려고 ‘또 왔어’를 무시했단 말이지. 또 올 수는 없을까. 그 시간.


시간은 또 오지 않더라고요. 아무리 기억을 진하게 떠올려 봐도 그건 만질 수도 없는 빛바랜 사진 같아요. 가 버린 시간은 영영 가 버린 것이지요. 후회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후회한다고 해서 그 시간을 다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요, 후회를 통해 후회를 덜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후회할수록 후회될 뿐이지요.


“후회? 그런 건 해서 뭐하는데?”

친구 하나가 이렇게 말했어요. 어느 날 친구들끼리 과거 얘기를 하는 중이었어요. 과거로 돌아가면 여행을 가겠다, 그 사람은 안 만나겠다, 비트코인을 사 놓겠다 등등. 친구들 사이에서 개그맨으로 통할 정도로 하루에도 몇 번씩 빵빵 터지게 만드는 친구가 그날따라 진지하게 말하는 거였어요. 다들 후회와 약간의 자조가 섞인 공상을 늘어놓고 있는데 화가 난 듯 말했어요. 내심 이딴 얘기는 듣기 싫다는 듯이. 우리의 ‘다시 돌아간다면 이렇게 저렇게 다르게 살 거야.’라는 말에 이런 말로 응수했지요.


“난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살 거야.”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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