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사인 내담자가 쓴 편지
“난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살 거야.”
일순간 모두 침묵. 그 친구가 설명을 덧붙였어요. 어차피 사람은 안 바뀐다고. 나는 안 바뀌니까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이 사는 거라고. 나는 후회 같은 거 안 해. 돌아가도 지금까지 살았던 그대로 똑같이 살 거야. 그제야 보통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하하거리며 웃더군요. 웃음 뒤로 헛소리들 집어치우라는 무언의 뒷말이 들렸지요. 다시 살아도 이 삶을! 맙소사, 이건 무한 긍정의 세계관이잖아요. 허무에서 초인적인 긍정으로 나아간 니체가 돌아온 줄 알았어요. 실없는 개그맨인 줄 알았는데 한국에서 부활한 니체였다니.
친구의 말은 이후에도 자주 생각났어요. 어떻게 하면 저런 태도로 삶을 살 수가 있지? 아무 후회할 게 없는 삶. 내가 산 모든 시간이 살아온 그대로 좋다는 마음. 받아들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살아온 모든 행적이 자기 삶이라고 인정하는 자세. 자기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따지고 들지 않는 태도. 살아온 그대로 좋고 앞으로도 자기 꼴대로 살겠다는 그 친구의 인생관이 어떤 고승의 깨달음 경구보다 장엄하게 다가왔어요. 친구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이 여전히 제 안에 살아있어요. 아직도 저에게는 이질적으로 느껴진다는 뜻이죠. 그렇게 생각을 다스리며 사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사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이잖아요.
친구는 정말이지 후회는 개나 줘 버리라는 듯이 살았어요. 친구가 오랫동안 심각한 표정으로 있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오전에 큰 타격을 받는 일이 생겨도 잠시 시무룩했다가 오후에 그 다음 재미를 찾아 금세 웃으며 농담을 하고 다녔어요. 무슨 일이 생겨도 자기 삶을 사랑하며 살 줄 아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건 대단한 특권 아니겠어요? 그 시절 친구에게 한 수 배웠어요. 제가 인생이 어떻다느니 인간의 심리가 어떻다느니 고상한 얘기를 떠들면 친구는 귓등으로도 안 듣고 무시하며 삶으로 대신 말했어요.
‘이 머리만 굵은 친구야. 인생은 이렇게 사는 거야. 생의 모든 시간을 사랑하며 사는 거야.’
사랑 얘기를 하자면 지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분이 한 분 더 계세요. 아는 수녀님인데요. 선생님도 잘 아실 것 같은데 성직자, 수도자라고 해서 다 사랑하며 사는 건 아니잖아요. 종교 단체 가까이서 지내다 보면 그들에게서 모순된 모습을 발견하는 것도 어렵지 않지요. 종교적 권위 아래 그저 안정적인 직장을 누리고 있는 듯 보일 때도 있고, 청빈을 서원한 사람들인데 경제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소박하지 않은 경우도 많고요. 그런 면에서 제가 아는 그 수녀님은 참으로 수도자 같았어요. 수녀님이 들려준 이야기가 있어요. 수녀님은 매주 고해성사를 보는데 하루는 고해소에서 입이 안 떨어지더래요. 한참을 침묵하고 있다가 딱 한 마디로 고해를 마쳤다고 하더라고요.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그토록 질박하게 사시는 분이 내뱉기 어려웠다는 그 사랑이라는 단어는 어떤 깊이가 있을지 생각을 해보았어요. 남은 인생을 사랑과 맞바꾸기로 결정하고 선택한 소명일 텐데. 진정 수도자답게 살면서도 그 삶 안에 담을 수 없었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수녀님이 실천하고 싶었던 사랑은 무엇이었기에 사랑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나의 사랑과는 한 억 광년은 차이가 나겠구나. 수녀님의 말씀은 제 속에서 오랜 시간 장이 익어가듯 서서히 발효되었어요. 시간이 흐르고 하나의 결정체가 의문의 형태로 떠올랐어요. 어떻게 모든 시간을 사랑으로 물들일 수 있을까?
요새 상담실에 조급증에 걸린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요. 그도 그럴 것이 현 시대가 더 많이 더 빨리 무언가 성취하라고 계속 압박하잖아요.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 무언가 많이 하려고 노력하다가 완전히 소진되기 직전인 사람들. 그렇게 달려서 무엇을 얻게 되는지 물어보면 대부분 명확하게 답하지 못해요. ‘오늘밤도 아니라 잠시 후에 이대로 죽는다면 지금의 삶이 만족스러울까요?’라고 질문하면 전부 그렇지 않다고 말해요. 그러고는 조금이라도 자기 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납득하고 싶은지 난데없이 그동안의 성과를 나열해요. 당연히 그럴수록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분명하게 만들 뿐이고요. 다들 최대한 많은 것을 최대한 적은 시간 안에 해내야 한다는 근본도 없는 도그마를 따르며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 거예요. 바로 이 지점이에요. 친구와 수녀님이 조급한 보통 사람들과 갈리는 지점. ‘또 왔어’를 선뜻 반기지 못했던 저 같은 사람과 달라지는 지점이요.
서로 극과 극의 생활방식으로 살아갔지만 친구와 수녀님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어요. 둘 모두 시간에 구애받는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어요. 둘 모두 영원히 살 것처럼 느긋했지요. 조급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두 사람 옆에 있을 때면 왠지 사는 게 덩달아 쉽게 느껴지곤 했어요.
덜 채울수록 시간은 사랑을 닮아간다.
두 사람을 생각하며 떠올린 문장이에요. 둘 모두 저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느니 하는 말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 뭘 더 하면 인생이 나아지는지 보여주지도 않았지요. 외려 그냥 살던 대로 살면서도 삶을 사랑하는 법을 보여주었어요. 시간을 채우려 하지 않으면서 모든 시간을 사랑으로 채웠지요. ‘나 지금 시간 있어. 너랑 지금 함께 있을 수 있어.’라는 여유. 그 덕분인지 주위에 항상 사람들이 따랐고요. 사람들과 어울릴 때면 다른 사람들을 늘 편안하게 해주었어요. 두 사람에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인생을 사랑으로 물들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물으면 이렇게 할 것 같아요. 속이 허하냐고 밥이나 먹자고 할 거예요. 시간이 되냐고 물을 필요도 없을 거예요. 시간은 언제나 타인과 함께 하라고 있는 듯이 사는 사람들이니까.
나중에 수녀님께 왜 사랑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냐고 물어보았어요. 그랬더니 그 시간도 사랑하기로 했다고 우문현답을 하셨어요. ‘또 왔어’에 ‘그래, 어서 와!’라고 말하지 못한 그 시간. 자동으로 후회가 들려고 하지만 친구를 따라서 후회도 이제 그만하려고 해요. 수녀님 말씀대로 그 시간도 사랑해 보려고 해요. 어차피 또 올 수는 없는 시간이잖아요. 하지만 앞으로도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은 또 올 거예요. 가정법의 세계에서 후회하느니 실제로 다가올 삶에서 잘해볼래요. 소중한 사람이 내 시간을 요구할 때, 그때 퍼뜩 알아차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주자고 다짐해요.
인생이 지금 나에게 요구하는 건 이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거야. 다른 건 아무래도 괜찮아. 훗날 지금을 뒤돌아봤을 때 후회 없는 시간이길 바란다면 이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나눠. 그것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공전과 자전을 하며 균형을 유지하는 우주가 지금 너에게 준 선물이야.
며칠에 걸쳐 생각을 정리하고 적다 보니 어느덧 다음 상담 시간이 다가오네요. 시간을 비워뒀어요. 비워 둔 그 시간도 사랑으로 물들길. ‘또 왔어요.’라고 하면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라고 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아요. 곧 만나요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