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분 경주마 글쓰기의 시작
11분 안에 최대한 빠르게 글을 쓴다.
자유롭게 연상되는 대로 쓴다.
철자나 맞춤법, 논리 등은 생각하지 않는다.
낯선 단어들을 조합하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형용사와 명사를 조합하자.
이상한 문장을 만들자.
새로운 단어를 발명하자.
하나의 표현을 단어만 바꿔 가며 계속 써보자.
이름을 쓰고, 이름 뒤에 감춰진 그 사람의 기이한 면모를 적어보자.
문을 열고 한 번도 나간 적 없는 곳으로 그들을 내보내라.
시간이 다 됐다.
11분 동안 얼마나 많은 단어를 썼는가?
다음에는 이보다 더 많이 써보도록 하자.
-픽사 스토리텔링, 매튜 룬
자 11분을 맞추어 놓고 글을 써보자.
오늘 처음 시도하는 글쓰기.
일단 무조건 생각나는 대로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쓴다.
뭘 쓸지 생각해놓지도 않았다.
아차.
문체는 반말로 하자.
그래야 내 생각을 여과없이 적을 테니까.
어디까지나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쭉쭉 뽑아내는 것이 목적.
완성된 글을 적는 것이 아니라
속도감 있게 생각의 속도대로 글을 쓰는 것이다.
이렇게 쓰고 있으니 '치유 글쓰기'가 생각난다.
내담자에게 수도 없이 권하는 글쓰기.
상담 효과는 집에 가서 자기를 성찰하는 글을 쓰는가 아닌가에 따라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도 역시 가슴이 답답할 때면 늘 하고 있는, 무작정 글쓰기.
무작정 쓰다 보면, 자기 검열 없이 무엇이든 쓰다 보면, 자기 안에 있었는 줄도 몰랐던 놀라운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생각'을 만나게 되고 까마득했던 '과거'를 만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수면 위로 올라온 생각과 감정은 더 이상을 나를 포로로 부리지 못하게 된다.
그 생각, 그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처럼 좋은 글쓰기.
비싼 돈을 주고 상담을 받으면서 왜 쓰지 않는가!
범국민적으로 장려되면 좋겠다.
아마 국가적으로 건강보험료도 낮아지지 않을까.
이런 상상이 든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의 즐거움을 배운 사람들이 성인이 돼서도 자유롭게 글을 쓰는 사회.
그곳에서는 정신이 병들고 아픈 사람이 거의 없다.
생각과 감정을 언제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기에 자기 안에서 내면의 억압도 없다.
외부에서도 내부에서도 억압이 없으니 모든 것이 자유롭게 소통되고 순환한다.
통하면 안 아프고 불통하면 아프다고 했다.
동심보감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
동심이 보감이 되는 것이다.
동심 같이 순진하게 마음껏 표현하는 것이 장려되는 것이다.
어떤가?
이런 세상에 한 번 살아보고 싶지 않은가.
멈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를 표현해도 괜찮은 사회.
언제 어디서든 그냥 나이어도 좋은 사회.
내가 그렇든 너도 그래도 된다고 인정하는 사회.
상상만 해도 속이 참 시원하다.
오늘 아침에 스터디를 했는데, 아니 정확히는 새벽에 스터디를 했는데 단 둘이 공부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검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새벽에 친한 두 사람이 만나서 마음껏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서로 주고 받으면서도 은근히 심리학 스터디라는 명분 하에 억압되고 있는 것이 있지 않은가.
상대방이 어떤지는 몰라도 나는 그랬다.
융의 심층 심리학은 내부를 파고든다.
프로이트도 마찬가지기는 하지만 융은 좀 더 친절하게 내면에 등불을 밝힌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그림자, 내 안의 열등한 면이 햇볕으로 나오게 한다.
오늘 스터디에서도 나의 그런 면은 내가 자각했던 것이다.
왠지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는 스스로 멈추었던 순간, 나는 검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융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억압에서 해방되라 촉구하는 메시지를 읽으면서도 그리 했던 것.
이 얼마나 모순되나.
그리고 한편 이 모순이 또 얼마나 반가운 것인가.
스스로에게 이토록 솔직할 수 있고 이만큼이나 투명할 수 있다면.
여기까지 쓰고 11분 알람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