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사의 아침편지
오늘 서점이자 심리상담센터를 청소했습니다.
청소를 할 때 가장 만지는 청소 도구는 청소기입니다.
아주 오래되고 낡은 붉은색 청소기.
당연히 유선이고, 여기저기 긁힌 흔적이 참 많은 친구입니다.
워낙 낡아서 마음 편안하게 여기저기 막 휘두르는 바람에
매일 생채기가 점점 더 늘어가고 있지요.
오늘 그 청소기를 만지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Surrender! 아 이것이 바로 순종이구나.'
내가 청소기 호스를 잡고 어디로 가든
청소기는 아무 저항 없이 따라옵니다.
긴 꼬리를 벽 한 귀퉁이에 받고
졸졸졸 저를 쫓아옵니다.
더 이상 쫓아올 수 없을 때만 덜커덩,
한 번 내색을 합니다.
'더 이상은 내 팔이 닿질 않아. 살짝 후진해 줄래?'
아차.
그제야 청소기랑 소통이라는 것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전까지는
늘 일방적인 지시만 내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그 누구의 손길도 거부하지 않는 자세.
세월이 지나도 결코 잃지 않은 기품.
낡은 외관 속에 숨은 자태.
문득 청소기가 우아하게 보입니다.
어느 여행지에서 봤던 500년 넘은 나무가 떠오릅니다.
그 나무가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순종 덕분이었습니다.
한결같이 그 자리에 서서
따가운 햇살과 거센 비바람,
모든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맞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피할 수 없었기에
두 팔 활짝 벌리듯 가지를 하늘로 뻗고
모든 것을 맞이하며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나의 뒤를 말없이 따라오는 청소기를 보며
진정한 강인함이란 순종의 덕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누군가 이끄는 길을 묵묵히 따라가 본 적이 있는가.
어떤 길이든 안내하든 대로
따라나설 각오와 결심이 나에게는 있는가.
오히려 사소한 일에도
내 뜻대로 안 된다고 투정 부리고 성질내면서
쓸데없는 힘을 빼고 있지는 않은가.
자기 꼬리를 길게 남기며 나를 쫓아오는 청소기에는
오히려 내면의 중심을 잃지 않고
자기를 이끄는 이를 따라가는 미덕이 있습니다.
돌아올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빵 부스러기를 남기며 숲 속으로 들어간 헨젤과 그레텔처럼
깊이 뿌리내리고 사방으로 가지를 뻗는 나무처럼
자기 본질을 잊지 않고
어느 누구든 맞이하고
누군가의 손에 자기 운명을 맡길 줄 아는 청소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 역시 하나의 청소도구가 아닌가.
신, 운명, 우주, 나보다 더 큰 생명의 청소도구로
지구를 쓸고 닦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손길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내면에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어디든 가려고 마음먹는 것이 최선일뿐.
그 손길은 어쩌면
나를 청소도구 삼아
결국 나 자신을 청소하려는 것일 테지요.
내가 그 손길을 환영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참 좋겠습니다.
미처 몰랐지만
매일 하고 있는 이 청소가
그 손길에 순종하는 연습입니다.
당신은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일이 있나요?
그 일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지금까지 어쩔 수 없었던 그걸 기꺼이 따라나서면 어떻게 될까요?
오늘은 잠시
나보다 더 커 보이는 청소기의 존재 앞에서
마음을 모았습니다.
청소를 마치며
온몸으로 가르침을 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긴 꼬리를 곱게 넣어 주었습니다.
왠지 최신형 청소기를 누가 준다고 해도
당분간 이 청소기와 함께 청소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