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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자유롭고 싶다면 쓸모를 지우렴.

by 나무둘

오늘도 서점이자 심리상담센터를 청소했습니다.


존재하고 있었으나 내 마음속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

청소를 하러 가는 길에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사물.

문득 카페트의 존재가 눈에 들어옵니다.


1층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길에 카페트가 있습니다.

가로는 1m가 조금 넘고 세로는 1m가 조금 안 되는

약간의 꽃무늬가 들어 있는 회색빛 카페트.


무게감 있는 그 카페트를 털면서 한 생각이 듭니다.

아 바닥에 늘 놓여 있었는데 몰라 봤었네.

카페트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안녕? 맨날 털면서도 네 존재는 몰라 봤었어. 미안.


괜찮아. 난 원래 늘 바닥에 있어서 눈에 안 띄잖아.


그러고 보니 많이 얼룩덜룩해졌네. 맨날 밟히고 사는 게 네 삶이구나. 그게 괜찮니?


네 말대로 그게 내 삶이야. 나는 다른 사람들의 발을 청소해주지. 사람들이 자기 몸에서 가장 소홀히 대하는 발. 그 발을 감싼 신발 말이야.


신발에 묻은 먼지를 네가 다 먹는 건데 기분 나쁘지 않아?


전혀. 그것이 나의 삶이야. 오히려 나로 인해 사람들 발이 깨끗해지잖니? 그리고 너도 매일 나를 깨끗이 털어주잖아.


그래도 오늘에야 난 네가 보였어. 그 낮은 곳에서 언제든 밟힐 준비를 하고 사는 너의 삶이 어떤지 가늠도 안 돼.


낮은 곳? 나는 이곳이 낮은 곳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그건 인간인 네가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기 때문이야. 나는 높고 낮음도 없이 늘 이 자리였는 걸?


아...


네 기준으로 보자면 난 바닥에 엎드려 밟히고 더럽혀질 때 내 존재 가치를 다하는 거야. 물론 나는 나 자신을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지만. 그것도 일면 사실이고 그대로도 좋아. 아무 문제없어.


문득 나의 청소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청소를 하기 위해 몸을 낮추고 굽히고 수그리고 쪼그리는 행위에

어떤 사심이 섞여 있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나는 과연 내 삶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너의 삶이란 그런 거구나. 남들의 오물을 받아서 오히려 그들을 투명하게 해주는 것. 똥을 거름으로 만드는 것과 같네. 대지처럼 모든 허물을 감싸 안고 오히려 생명을 북돋아주는구나.


그렇게 멋있게 생각해 주다니 고마워. 근데 난 그냥 있을 뿐이야. 그냥 이렇게 있음으로써 내 존재의 의미를 다하는 거야. 오는 발길 가는 발길 다 붙잡지 않고 난 자유롭게 있지.


카페트의 말을 듣고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 떠오릅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아 나는 무엇을 바라고 있었던가.

청소를 하면서조차 나는 무엇을 바라고 있었나.

매일 글을 적는 행위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

무언가 두렵다는 것,

무언가 바라고 있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내 기준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너, 네 기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나. 그런데 오히려 내가 더 자유롭지 않구나. 늘 뭔가 두려워하고 있는 거였어. 청소를 할 때조차.


카페트가 말없이 싱긋 웃습니다.

지저분하게 일그러진 카페트를 보니 마치 조르바의 표정을 보는 듯합니다.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그래, 그리스인 조르바는 주인공을 자처하지 않았지.

그럼에도 주인공이 되었어.

소설 속에 화자가 스스로 비켜설 수밖에 없었지.

자기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는 짓은 조금도 하지 않았던 조르바.

아무 쓸모도 없이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했던 조르바.

본성에 충실히 살며 강렬하게 존재한 조르바.

넌 꼭 조르바를 닮았구나.


카페트를 다 털고 다시 바닥에 곱게 까는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카페트가 한 마디 합니다.


그냥 자기 자신이기만 하면 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어. 진정 자유롭고 싶다면 쓸모를 지우렴.


오늘은 카페트에게 진정 자유롭게 사는 것이 어떤 삶인지 배웠습니다.


당신은 무엇에서 자기의 쓸모를 찾나요?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바라고 있나요?

바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저 존재한다면 나 자신이 어떻게 느껴질까요?


오늘은

카페트처럼 조르바처럼

무언가 바라고 두려워할 때마다

나 자신에게 이렇게 이야기해 줘야겠습니다.


쓸모를 따지는 건 쓸모없는 짓이야.

쓸모를 따지기 전에 네가 존재하는 거야.

아무 쓸모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

쓸모도 없이 넌 이미 자유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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