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식의 노래 "선운사"를 듣다가 문득 선운사 동백숲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와 초록으로 가득 찬 기나긴 길을 천천히 오래오래 걷고 싶었다.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드득
지는 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
...
평일이 주는 평화,
선운사 버스터미널부터 선운사까지 이어진 아름다운 길을 온전히 누리며 걸었다.
오래된 나무들이 드리워준 그늘 속을 걷다 보면 몸도 마음도 연둣빛으로 물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느낌!
얼마 전 유튜브에서 “월말 김어준"을 듣는데 어느 학자가 나와서 말했다.
느낌은 기억이라고
나의 데이터 베이스에 기초한다고
내가 받는 느낌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그 느낌들은 실은 내가 살아오면서 축적하고 경험한 것들에서 나온 것이지 그냥 우연히 갑자기 나를 찾아온 게 아니었다는 이야기... 그거였구나. 그래서 느낌대로 했을 때 마음이 편안했구나.
아... 그 느낌 안에 내 생애의 기억들이 담겨 있었던 거야.
선운사 대웅전 앞 나무
노스님과 함께 오랜 세월 도를 닦은 듯 정갈하다.
대웅전으로 들어가서 인사를 드렸다.
바라는 바를 들어주시기를 바라며 깊이깊이 절을 했다.
절을 할 때는 이상하게 몸이 시원하다.
오래전 강원도에 있는 절에 템플 스테이를 간 적이 있다. 새벽 예불 시간에 절 한번 하고 염주하나 끼고 절 한번 하고 염주하나 끼고 해서 108배를 했는데 그때도 몸이 점점 시원해지는 경험을 했었다.
그 108개의 염원이 깃든 염주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나의 기원이 담겨있어서 그런지 볼 때마다 소중하게 느껴진다.
엄마는 늘 어느 절이든 가면 불전함에 천 원짜리 한 장이라도 넣고 절을 하고 오라고 하셨다.
맨입으로 무언가 얻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취지의 말씀이다. 그게 엄마의 삶이기도 했으니까. 노력 없이 무언가를 얻어본 적이 없으신... 노력보다 덜 얻은 경험이 훨씬 많았을 우리 엄마.
절에서 절을 하면서 점점 마음이 편안해졌다.
대웅전 뒤쪽으로 가니 꽃은 지고 청록색으로 단단해진 동백숲이 병풍처럼 둘러 쳐져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어 숲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동백숲을 바라만 보았다.
선운사에서 나와 돌다리를 건너면 산 쪽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녹차밭 한가운데 서 있는 아름드리나무 한그루가 눈길을 끌었다. 주위가 온통 나무들인데도 유난히 그 나무가 마음으로 들어왔다.
내 기억의 어느 회로에서 나온 끌림일까...
개울물이 나무로 덮여 하늘도 물도 땅도 공기도 연둣빛이다.
오랜 세월 물의 흐름 속에서 평평해진 바위가 쉬어 가라는 듯하다. 앉아 쉬기에 더없이 좋다.
찬물에 발을 담그고 간식을 먹었다.
마음도 따라와 머문다. 머릿속이 어제와 내일과 떠나온 곳을 떠돌지 않고 온전히 내 몸이 있는 이곳에 와서 머문다. 몸과 마음이 함께 있는 게 얼마만인가.
숲 속으로 들어가서 걷기 시작했다.
어제의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길을 걷는다.
흐리다 간간이 비가 내리고 비가 일으키는 흙냄새와 습기를 머금은 숲 속은 고요하다.
도솔제라는 호수 주위를 걷고자 올라왔는데 산속에 호수가 있다는 게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한 시간쯤 숲 속을 걸으니 언덕이 나왔다. 그 언덕을 올라가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산 정상에서 만난 산속 호수 도솔제
비가 내릴 듯 흐린 하늘 아래 서서 호수가 진짜 있었네 하며 놀랐다.
호수를 끼고 숲길을 천천히 두 시간 정도 걸었다.
연둣빛 숲을 한가득 안고 풀냄새와 흙냄새를 맡으며 걷는 길, 푹신하고 경쾌하고 기분 좋았다.
길의 끝은 이렇게 구부러져 있어야 한다.
저 산모롱이를 돌아가면 무언가 있을 것 같은 기대.
늘 무언가를 기다리는 우리,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를 기다리는 자의 애달픔이 저 구부러진 길의 끝에 있다.
긴 산책을 마치고 돌아 나오는 길.
녹차밭 한가운데 서있는 나무 한그루 다시 만났다.
연둣빛 물이 온몸과 온 마음에 다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