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
오후부터 온다는 비가 아침 일찍부터 내리기 시작했다. 보슬비가 아닌 주룩주룩 내리는 비, 하지만 당황하지 않는다. 우비를 꺼내 입고 우산을 펼치고 배낭을 바투 매고 길을 나섰다.
압록에서 구례 어디쯤까지 걸을 작정이다.
비가 주는 청량감이 마스크를 쓴 얼굴로 달려든다. 이 느낌이 좋아 비가 오는 날도 걷는다.
간간이 차들만 지나갈 뿐 걸어가는 사람은 없다. 조용한 가운데 빗소리와 자박자박 발소리만 들린다. 이 길은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많은 곳인데 비가 내려 한적하다.
한적함은 우리에게 선물이다.
비 내리는 섬진강과 물이 오르는 나무들과 새싹을 품은 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이 고요함이 좋다.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바람이 우리 곁을 부드럽게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시간, 늘 부대끼던 일상은 비현실이 된다.
비가 그치고 나면 연초록의 싹들이 들판과 강가를 채울 것이다.
생명은 그런 것이다. 한번 터지면 둑이 터진 것처럼 온 대지를 덮는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새로운 싹을 낸다.
어김없이 오는 봄이지만 늘 새롭다. 늘 설레임을 준다.
감나무 아래 풀들은 벌써 봄이 온 듯 연둣빛이다.
비가 내려 빛깔이 더욱 선명하다. 나무들은 겨울의 끝자락쯤의 빛깔을 띠고 있지만 머지않아 초록으로 덮이기 시작할 것이다.
봄이 오기 전 초록을 품은 나무들이 좋다. 그 속에 숨겨진 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즐겁다.
막 피어나려고 하는 산수유의 아릿함이 봄의 느낌과 닮아 있다.
햇살이 화창한 날이었다면 활짝 피어났을 산수유, 서늘한 봄비로 몸을 사리고 있다.
산으로 이어진 구불구불한 길 끝에 산벚꽃이 이르게 피어 있다. 비는 내리고 빗속 풍경들은 여름날 도시의 아스팔트처럼 뜨거워진 마음에 시원하고 맑은 공기를 넣어준다.
조금 식히고 가자. 조금 쉬었다 가자.
안개가 피어오르는 산을 보며 비 내리는 강가를 걷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 이 순간만큼은 돌아가서 만나게 될 복잡한 일들은 머릿속에 아예 없다.
그저 현재 이 곳 풍경 속에 내가 있다.
농부였다면 비에 젖은 팍신한 흙에 무엇을 심을까 고민했겠지만 나는 그 흙에 스며드는 빗물이 메마른 내 삶에 위로처럼 느껴진다.
비가 나뭇가지 끝에 매달렸다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린다. 바람도 간간이 불지만 우리에게는 우비와 우산이 있다. 물기 있는 서늘한 공기가 기분 좋다.
넓은 밭에 매화나무 한그루 이른 꽃을 피우고 있다.
홀로 온 밭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밭고랑을 가지런히 갈아 놓은 농부의 수고가 있어 온갖 생명들이 살아 오른다.
온 세상 꽃들이 한꺼번에 피지는 않는다.
빗속에 봄꽃 몇 송이 피어 있다. 꽃피지 않았으면 몰랐을 서로 다른 색을 품고 천천히 피어 난다.
비는 내리고 이 작은 꽃 속에 숨은 하나의 우주를 상상한다. 수많은 작용과 반작용으로 피어나는 신비한 생명의 원리를 생각한다.
날이 흐리니 쉬었다 가자.
마을 앞 정자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비 오는 강과 먼 산을 바라본다. 흐르는 강물이 속삭인다. 괜찮다고, 좀 쉬라고, 잘하고 있다고...
마을 매실나무에 꽃이 피었다.
땅을 향해 뻗은 나무와 뒷산이 어울려 멀리 떠나온 기분을 한껏 느끼게 한다. 꽃은 벌의 도움으로 열매가 될 것이다.
강은 굽이치고 강폭은 넓어지고 좁아지기를 반복한다.
강의 상류와 하류가 다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렇게 강의 폭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강의 넓이에 따라 서식하는 나무들과 식물들이 다르고 물속에 살고 있는 생명들이 다르다. 먹이가 많은 곳에는 오리와 백로가 많고 강의 흐름이 빠른 곳에는 그곳에 적응한 다른 생명들이 살아간다.
버들강아지가 피어나고 있다.
내가 어렸을 적 보았던 버들강아지는 봄을 제일 먼저 알려 주었고 통통하고 토실한 복실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근데 이곳 버들강아지는 좀 야윈 모습이다.
초등학교 때 새 학기가 되어 친구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친구가 새집으로 이사를 갔다며 나와 다른 한 친구를 초대한 것이다. 설레이며 그 친구 집에 가는 길 개울가에 토실한 버들강아지가 피어 있었다. 버들강아지를 좋아한 어린 나는 그 모습을 한참 들여다보며 기분이 좋아져 가벼운 발걸음으로 친구 집으로 갔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다음은 아프고 불편한 기억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나를 초대한 친구는 친절했는데 함께 초대받은 다른 친구는 이상하게 나에게 자꾸 시비를 걸었다. 떡이 맛있어서 몇 개 집어 먹었더니 나에게 다 들리는데도 집주인 친구에게 "쟤는 굶고 왔냐 왜 저렇게 먹어대냐"라며 흘겨보고, 나를 왜 초대했냐고 비난하고... 나에 대해 노골적으로 기분 나쁘게 대했다.
집주인인 친구는 그러지 말라고 다 듣는다고 말렸지만 사실 그 아이가 더 절친이라 크게 내편을 들어주지도 않았다. 나는 그 아이가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불편하고 기분이 안 좋았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참았다.
불편하게 놀다가 먼저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도 큰 상처였다. 게다가 제대로 대거리를 못한 나 자신도 한심했다. 그 돌아오는 길에도 버들강아지가 보였지만 더 이상 귀엽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았다.
그 아이들의 집은 부유했다. 나는 동네 맨 끝집에 살고 있었고 부모가 모두 돈을 벌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 당시에는 흔하지 않던 맞벌이 가정이어서 엄마는 우리를 살뜰히 살피지 못했다. 우리는 그냥 각자 알아서 자랐다.
그런 이유였을까... 그 당시는 조금 주눅이 들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자신 있게 화도 못 냈던 것 같다.
울 엄마에게 이야기했으면 당장 쫒아가서 그 싸가지 없는 아이 머리를 다 쥐어뜯었을 텐데...
버들강아지는 봄의 설레임을 안고 오지만 나에게는 춥고 서러운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구례에 도착하니 가슴이 탁 트이는 풍경이 펼쳐진다.
마을을 지키는 오래된 나무와 섬진강, 흐린 하늘과 지리산이 그림 같다.
구례구역 근처 종종 들리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정갈한 반찬과 간이 슴슴하니 맛 좋은 참게탕이 비와 추위로 서늘해진 속을 데워 주었다. 몸이 노곤해지고 뽀송한 곳에서 한숨 자고 싶어 진다.
식당 아주머니는 다리가 불편했다.
약간씩 다리를 절면서 열심으로 움직인다. 무뚝뚝해서 말씀은 거의 없지만 음식이 끓는 과정에 짧은 한 마디씩 하신다. 참게는 어떻게 발라먹어야 한다든지, 이 정도 끓었으면 야채를 먹어야 한다든지 하면서.
작년에 왔을 때는 식사를 하고 나서 정말 맛있다고 잘 먹었다고 했더니 직접 가꾼 감 몇 개를 집어 주셨는데 집에 와서 먹어보니 참 맛있었다. 아주머니의 속 깊은 정이 느껴졌다.
오래오래 그곳에 계시기를...
점심을 먹고 구례구역 건너편에 있는 카페에 갔다.
근처에는 카페가 이곳 하나뿐이다. 섬진강과 지리산을 보며 차를 마실 수 있어서 좋다.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리고 젖은 운동화는 축축하다. 양말을 갈아 신었더니 의외로 뽀송뽀송해서 급 위로를 받았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비 오는 창밖 풍경과 앞산을 보고 있자니 비 오고 바람이 부는 바깥 풍경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고 카페 안이 새삼 안락하다.
비가 많이 와서 더 이상 걷기 어려워지기도 했지만 일행 중 한 명이 몸이 조금 안 좋아 그냥 쉬기로 했다.
일찍 돌아가려고 기차를 보니 예약이 다 차있어 그럴 수도 없었다. 우리는 그냥 카페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무언가를 읽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얼마간 앉아 있었다. 그런데 문득 시간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걸을 때는 늘 부족했던 시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시간은 의외로 빨리 심심해졌고 길었다.
택시를 타고 화엄사로 갔다.
비 내리는 산사의 아름다운 풍경이 우리를 반긴다. 절의 지붕과 지붕이 맞닿은 모습과 산과의 조화로움, 평지가 아닌 높이 마다 다른 건물 배치가 화엄사를 더욱 특별하게 해 준다.
절에 가면 뒤뜰에 꼭 간다.
휴식과 평화로움, 친근한 뭔가가 있다. 대열의 뒤를 따라가는 편안함, 중심의 수선스러움에서 벗어나 조용히 자리 잡은 풍경을 보는 기쁨이 있다.
무심히 서 있으면 뒷산과 이끼 낀 돌벽이 말을 걸어올 것 같다.
인상 깊었던 단아함...
화엄사를 돌아 나와 화엄사 앞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기차 시간을 기다렸다.
찻집 원목 창살 사이로 숲에 비가 내리는 모습이 보이고 대추차 냄새가 달큰하게 퍼지는 실내에서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조금씩 어둠이 내려앉고 기차 시간이 다가왔다.
화엄사에서 택시를 타고 구례구역에 왔다.
역에 내리는 밤비는 쓸쓸하고, 낯선 곳에서 맞이하는 어둠은 우리를 색다른 기분으로 이끈다. 이런저런 상념과 어두워지는 구례를 뒤로하고 기차를 타러 갔다.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고 낯선 곳에 더 머물고 싶기도 한 마음이 공존하는 저녁.
"돌아가야 다시 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