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숲을 걷는 즐거움

고창 운곡 습지

by 정안

계절은 언제나 오고 갔다.

그냥 내 곁을 스쳐가는 날들이 많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걷기를 시작하고부터 계절의 변화는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봄이 오기 전 부는 코끝이 매운 바람과 풀리는 강가의 아슴한 풍경, 몇 시간을 걸어 도착한 마을에 해가 지는 모습, 계절별로 달라지는 섬진강과 한여름 맨발로 뜨거운 모래를 밟고 강에 발을 담갔을 때의 평화로움... 대나무 숲에서 듣는 대바람 소리, 벚꽃이 날리는 밤, 나무가 온전히 제모습을 드러낸 들판, 색을 품은 가을 숲에서 보낸 한나절, 평일 오후 아무도 없고 우리의 발소리만 들리는 목초지에서의 긴 산책...


걷는다는 것은 영혼이 맑아지는 일,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걷기 위해 여행을 갔고 걷기 좋은 길을 찾아서 여행지를 정했다.

걸을 수 있는 길은 멀어도 걸었다.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우리는 아무 걱정 없이 그저 걷기만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나는 내가 이렇게 잘 걷는 줄 몰랐었다.

어느 날 친한 지인과 여행을 갔는데 걸을수록 이상하게 발바닥이 시원해지고 힘이 났다. 두 시간 이상을 걸어도 힘들기는커녕 몸이 더 가벼워졌다. 그렇게 시작한 나의 걷는 여행은 이제 3년을 넘기고 있다.

가을은 자꾸 내 발바닥을 충동질한다.

나가라고, 걸으라고, 나무와 들판과 흙과 새로운 공기를 마시라고. 나뭇잎은 물들어 가고 세상은 가을로 가득 찼다.


사람이 많지 않고 마음껏 걸을 수 있는 곳을 찾다 고창을 발견했다.

고창읍성에서 고창천을 따라 한 시간 반 정도 걸으면 고인돌 공원이 나온다. 고인돌 공원에서 언덕 같은 낮은 산 하나를 넘으면 운곡습지이다. 운곡습지는 세 시간 정도 걸어야 다 돌아볼 수 있는데 곳곳에 쉼터가 있어 천천히 쉬엄쉬엄 걷기 좋다.


한 달 간격을 두고 고창에 두 번 갔다.

10월에는 고창천과 운곡습지 일부를 걸었고 11월에는 운곡습지만 걸었다.



고창천과 운곡습지(용계마을 가는 길) - 10월

오래된 성곽이 주는 고요함, 묵직함이 있다.

고창읍성은 조선시대 후기 축성하였고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성벽의 축성법으로 보아 1573년(선조 6년)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성곽길을 따라 걷다 보면 한쪽으로는 고창 시내가 다른 쪽으로는 성 안이 보인다. 역사의 한가운데 서있는 느낌이랄까(ㅎㅎ).


가을이 시작되는 10월의 고창읍성은 아침 시간이기도 하고 코로나로 인하여 사람이 별로 없었다. 고즈넉한 가운데 재잘거리는 아이들 한 무리가 나타났다. 소풍을 나온 어린이집 아이들이었다. 선생님은 한 명인데 열명이 넘는 아이들은 짝꿍의 손을 잡기도 하고 놓기도 하고 지나가는 우리를 쳐다보느라 선생님의 호출을 받기도 한다. 우리가 따라가며 돌봐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가만가만 사랑해야지. 이 작은 것들"

-이철수『나뭇잎 편지』



고창천은 여러 계절의 풍경을 보여준다.

고창은 작은 도시이고 평일이기도 해서 하천을 걷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리가 걷는 1시간 반 남짓 동안 짐을 실은 자전거를 탄 아저씨 한분과 깨를 말리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난 게 전부였다. 고소한 깨 냄새가 지나가는 우리에게도 풍겨왔다. 등이 굽은 할머니가 깨 나무를 매만지는 모습에서 나는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입이 합죽하고 결벽증이 있을 정도로 깔끔하며 바느질을 잘하셨던 외할머니,

평생 자식들에게 욕 한번 안 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술을 좋아하는 외할아버지 수발드시느라 자식들은 일하기 위해 태어난 듯 일을 많이 시켜서 엄마는 외할머니가 조용하지만 지독한 사람이라고 가끔 회상했다.


100살이 되던 해 생일상을 받으시고 며칠 후 홀연히 돌아가셨다. 외삼촌 내외가 밭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이불에 누워 평소처럼 조용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나중에 외할머니 장롱을 열어보니 속옷 몇 벌과 꼭 필요한 몇 가지 옷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돌아가실 것을 알고 자식들에게 정리의 슬픔을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최소한만 남기셨을 외할머니의 심정을 생각하니 먹먹해졌다.


호탕하고 감정을 잘 쌓아두지 않는 엄마도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달을 시름시름하셨다. 혼자 있으면 눈물이 나고 가슴이 텅 빈 것처럼 이상하다고 하셨다. 자식만 있으면 울다가도 웃을 우리 엄마도 이때 큰 상심을 겪으셨다. 나는 엄마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가 없다.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고창천을 걷다 보면 고인돌 공원이 나온다.

고창 고인돌 공원은 기원전 4~5세기경 조성된 동양 최대의 고인돌 집단 군락지인 고창 지석묘군으로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밀집된 고인돌군이며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 묘제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사상, 사회상, 문화상, 묘제상 등을 알 수 있는 자료라고 한다.


넓은 벌판과 구릉지대 곳곳에 고인돌이 발굴되어 있는데 숲과 언덕과 풀이 잘 어우러져 있다.

그냥 돌 같은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간직하고 있는 고인돌을 보며 남아 있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사본 -20201016_141422.jpg

낮은 산언덕을 넘어가면 숲길이 나온다.

호젓한 산길을 걸어가노라면 새소리도 들리고 바람도 간간이 불어 온다. 숲이 주는 위안과 평화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다.



습지는 생명의 보물창고, 살아 오르는 생명들이 보인다.

즐거움으로 노래를 부르는 풀과 나무와 새와 공기를 느낀다. 그 안에 잠시라도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하다.



길이 있고 하늘이 있고 나무가 있다.

혼자만 드러나려 애쓰지 않고 서로에게 어울리는 색과 모습으로 오래도록 이곳에 있을 것이다. 풍경은 그런 것이다. 네가 무엇을 하든 떠나가든 돌아오든 나는 이 자리를 지킬 것이다라는 약속처럼.


나무는 잎을 억제하지 않고

때가 되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돋아나고

스르르 떨어지게 한다.

물도 어느냐 마느냐를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

온도의 법칙에 맡긴다.

<중략>

나는 날마다 내 풍경 속을 걷는다.

-메리 올리버 "완벽한 날들"



고창 운곡습지 - 11월


가을 습지를 걸을 생각에 설레였다.

가을은 깊었고

자작나무는 잎을 모두 떨군 채 그 희디흰 모습으로 숲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는 모습처럼 부드럽게 섞인 숲의 색들이 아름답다.




흐렸다 맑아지기를 반복하는 하늘, 가을숲은 맑아도 흐려도 좋다.



햇살과 그늘, 초록과 물들음

두 숲은 나란히 서서 내내 마주 보고 있다. 서로를 바라보며 잎을 피우고 떨구고 바람과 눈을 맞고 햇살 속에서 반쩍이며 또다시 잎을 피울 것이다.




가을볕에 잘 마른 나뭇잎 위를 걸으면 발밑은 푹신하고 기분 좋은 가을 냄새가 난다. 햇살 아래 빛나는 나무와 숲길이 어서 오라고 품을 내어주는 것 같아 따뜻하다. 고맙다.



쉬어가라고 마련해준 정자에 앉아 습지공원을 바라본다.

구불구불한 길이 보인다. 뱀처럼 구불구불하다. 문득 서정주가 떠오른다. 1915년 고창에서 태어난 서정주, 그의 시를 좋아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었다"에 열광했다. 서정주의 시가 주는 느낌과 언어가 좋았고 그 세계에 매료되었다. 백과사전에서 그의 이름을 치니 직업에 "시인, 친일 반민족 행위자"라고 나온다. 씁쓸하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 『자화상』


시를 해석하는 건 선생님들이나 할 일이겠지. 나는 아무것도 해석하지 않으련다. 가을숲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듯이.



가을숲에서는 어떤 말도 필요 없다. 그냥 걷기만 해도 좋고 눈을 어디에 두어도 좋다. 가을로 가득 찬 나의 세상을 그저 바라보고 마음에 담고 아무 생각 없이 걷기만 하면 된다.



전나무숲이 햇살에 반짝이며 긴 나무 그림자를 만든다.

나무 톱밥을 깔아놓은 바닥은 폭신하고 숲은 깊다. 올려다본 하늘은 멀다. 우리는 이곳에서 간식을 먹으며 오래오래 앉아 있었다. 적당히 부는 바람과 나무 사이로 보이는 풍경들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든 시간이었다.



햇살 아래 반짝이는 이 아름다운 생명들에 경의를 표한다.




습지를 보호하기 위해 한 사람 정도 걸을 수 있는 좁은 길이 이어져 있다. 노란 표시는 내려간다는 의미, 조심하라는 따뜻한 배려의 표식이다. 자연은 위로를 건네고 이 길을 만든 사람은 온기를 보낸다.



초록이던 고인돌 공원에도 가을이 와 있었다. 화려한 단풍의 시간은 지나고 몇 개 남지 않은 잎들이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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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린 걸까. 아니다. 무심히 걸어가다 본 모습이다. 작품을 보러 미술관에만 갈 일은 아닌가 보다. 이 조화로움에 감탄하며 걸어야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어 나는 오늘도 걷는다.



우연히 들어선 논둑길.

농부의 수고로움이 가득한 이곳에서 지는 해를 가을 억새 사이로 본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뭉클함이었다. 누가 심어 놓았을까. 따뜻하게 손 한번 잡아 주고 싶다.



길 위에 삶이 있다.

-유시민『유럽 도시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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