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다

파도를 만드는 건 바람이었지

by 정안

말없이 바라본다. 겨울바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 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이하 생략>

-김남조 "겨울바다"


대입 학력고사가 끝나고 중학교 친구들과 겨울바다에 간 적이 있었다.

누군가 겨울바다에 가보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대천에 갔었다. 춥고 쓸쓸했던 바닷가였지만 친구들과 팔짱을 끼고 걸으며 신이 났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날 집에 전화를 걸기 위해 바닷가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갔는데 웬 인상 좋은 젊은 여자가 앞에 있어 깜짝 놀랐다. 근데 그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었다... 정면이 거울이었던 공중전화 박스였는데 그걸 모르고 사람이 맞은편에 있는 줄 알았다.


친구들은 나보고 어리버리 하다며 웃음을 터트렸지만 내 모습을 아무 편견 없이 바라본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때 그 친구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살고 있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한 명을 제외하고는...


십 년 전쯤 우리 집 근처 식당에 갔다가 그때 겨울바다에 함께 갔던 네 명 중 한 명의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서로 무척 반가워했고 자주 만나자 했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던 것도 같다. 그러나 서로 생활에 치여 자주 만나지도 연락을 주고받지도 않았다. 얼마 후 그 식당이 없어졌고 그녀도 사라졌다. 핸드폰도 다른 사람의 소유로 되어 있어 찾을 수가 없다고 다른 친구가 말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때 분명히 서로의 전화번호를 주고받으며 저장했는데 내 핸드폰에 그 친구의 전화번호가 없었다. 나는 핸드폰에 저장한 전화번호를 정리한 적이 없었는데도...


나는 그 친구와 중학교 때 아주 친한 사이였다.

학교가 끝나면 그 친구의 집에 가서 만화책도 보고 떡볶이도 해 먹고 하면서 자주 놀아서 부모님도 동생들도 다 알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도 만났고 심지어 내가 대학 졸업사진을 찍을 때 정장이 없어서 그 친구의 정장을 빌려 입기도 했다. 대학을 가지 않고 취업을 한 그 친구는 예쁘고 잘 웃고 착했다.


나는 너무 무심하게 내 인생만 살았던 걸까...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진다. 차가운 바닷물이 내속으로 들어온 듯 서늘하다...



붉은 등대가 바람과 파도에 흔들리며 떠 있다.

흔들리지 않으면 결국 부서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흔들리며 꽃을 피웠으리라.



드라마 "학교 2013"에서 좌충우돌 가슴 시리고 아프게 아프게 크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인 장나라가 시 "흔들리며 피는 꽃"을 읽어주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보며 주책맞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이들에게 나도 전하고 싶었던 마음, 나만 아프게 핀 꽃이 아니었구나 하는 위로, 많은 감정들이 밀려왔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때때로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고, 다시 잔잔해진다.

수평선 끝 흰 물체는 종이배처럼 보이지만 요트다. 그림 같지 않은가.


어렸을 적에 공책을 뜯어 종이배를 접어 세숫대야에 띄우며 놀곤 했다.

시간은 언제 이리도 많이 흘러 온 것일까... 바다에 가득 찬 물처럼 늘 가득 차 있을 줄 알았던 시간들이 가고 있다.



바닷물도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바다 저 멀리서 파도가 밀려온다.

문득 영화 "관상"에서 김내경(송강호)이 바다를 보며 되뇌던 마지막 말이 생각난다.


"난 사람의 얼굴을 봤을 뿐, 시대의 모습을 보지 못했소.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만 본 격이지. 바람을 보아야 하는데.

파도를 만드는 건 바람인데 말이요."


그렇지 잔잔한 바닷물을 파도가 되게 하는 건 바람이지... 이 글을 쓰며 깨닫는다.


출렁이는 푸른 물결 너머로 해가 진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저물어 간다.


내가 내가 되기까지 견뎌온 시간들이 있어 지금의 내가 있다.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몸부림치고 숨차게 달렸던 날들이 있다. 그 시간을 잘 건너온 나에게 위로를 전한다. 망망한 바다처럼 쓸쓸한 인생이지만 함께 걸을 수 있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 따뜻하다. 고맙다.


어둑해지는 하늘을 보며 노래를 듣는다.


겨울 바다로 가자.

메워진 가슴을 열어보자. 스치는 바람 불면 너의 슬픔 같이 하자.

너에게 있던 모든 괴로움들은 파도에 던져버려 잊어버리고, 허탈한 마음으로 하늘을 보라.

너무나 아름다운 곳을. 겨울 바다로 그대와 달려가고파. 파도가 숨 쉬는 곳에.

끝없이 멀리 보이는 수평선까지 넘치는 기쁨을 안고.

-푸른 하늘 "겨울바다"




이전 04화가을숲을 걷는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