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 선운산

그 빛 속으로

by 정안

가을은 빛의 계절이다.

빛의 방향에 따라 숲과 나무가 완연히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진을 빛의 예술이라고도 한다.

빛을 어떻게 넣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의 사진이 나온다.


어딘가로 떠나기 딱 좋은 가을날의 연속이었다.

내 마음이 어딘가를 끊임없이 떠돌고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왜 자꾸 어디로 떠나고 싶은 걸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떠나지만 돌아온다는 것, 그리고 다시 떠난다는 것이다.


선운산,

여름날 걸었던 숲과 도솔제가 가을에는 어떻게 변하는지 궁금했다.

가을의 나무들은

무심히 툭 있어도 멋진 동네 오빠를 보는 것 같다.


숲 안에서 햇살이 쏟아져 나온다.

길고 환하고 부드럽게 숲을 비춘다.


가을 숲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도솔제로 가기 위해 올라가다 보니 산속에 카페가 있었다.


따뜻한 커피가 마시고 싶어 줄을 섰다.


젊은 남자분이 혼자 주문을 받고 커피를 만들고 있었다.

바깥은 아름다운 가을날인데 그는 짜증이 나 있었다.


커피를 주문하는 사람이 많기도 했지만,

주문하고 몇 분도 되지 않아 재촉하는 사람들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것 같았다.


"주문한 커피가 아직도 안 나왔는데 언제 나와요?"

"주문하신 지 3분도 안됐습니다. 커피 한잔 내리는데 4분이 걸리는데 그렇게 급하시면 캔커피를 드셔야죠"

"아... 네"


중년의 여자분은 민망한지 자리에 가서 앉아 기다리고 카페 젊은이는 분이 안 삭는지 계속 자신의 손님들의 참을성 없음을 비난한다.


나는 조금 불편해졌다.

가을 숲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산책을 하고 싶었는데 그 커피가 이렇게 짜증을 내며 힘들게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니 그냥 갈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얼마 후 그가 우리의 주문을 받았고 커피가 나왔고 우리는 카페를 나왔다.


커피맛은 몹시 실망스러웠다.

거기까지다. 아닌가...


왕이 되려는 자, 왕관의 무게를 견디라고 했던가.

카페를 통해 수입을 얻고자 하는 자는 손님의 무례를 견뎌야 하는 걸까.

커피를 먹고 싶은 자는 카페 주인의 무례를 견뎌야 하는 건가... 잘 모르겠다.


단지 내가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아무에게나 무례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왕도, 카페 주인도, 카페 손님도, 그 누구도.

사막에 하나밖에 없는 물 가게 주인이라도 말이다.


여름날 보았던 숲은 이제 가을로 가득 차 있다.

도솔제 올라가는 길까지 오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갑자기 고요해진 숲 속에 우리들의 발소리만 들린다.

바싹 마른 나뭇잎 밟히는 소리가 경쾌하다.


길 한쪽에 심은 초록의 풀들은 수선화이다.

봄이 되면 이 숲의 주인공은 벚꽃과 수선화가 될 것이다.


도솔제를 반쯤 돌다 쉬어 가기로 했다.

호수근처 바닥에 앉아 간식을 먹고 뭔가를 마시며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흐르는 물결과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을 본다.


바람의 방향은 이리저리 바뀌고 물살은 우리를 향해 왔다가 으로 새어 나갔다가

우리들 반대쪽으로 흐르기도 한다.


넋을 놓고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다.

바람이 사르르 다가와 얼굴을 스칠 때

나는 아득한 시공으로 사라진다.


고요한 그곳에 한참을 앉아 있다 일어났더니 갑자기 다가오는 현실의 풍경.

낯설다.


햇살이 잘 드는 곳의 나뭇잎들은

사랑을 많이 받은 아이의 볼처럼 부드럽고 환하다.


물 바람이 불고 여러 가지 색을 품은 단풍잎의 바스락 소리가 들린다.

자연은 참으로 조화롭지 않은가!

색도 모양도 배치조차도.


햇빛을 받아 환한 나뭇잎과 나무 그늘 아래 진하게 보이는 물이 만나

조화롭고 감탄스러운 풍경을 만들었다.


녹차밭은 여름과 크게 다를 게 없는데

한가운데 우뚝 서 있던 푸르르던 나무는 이파리 하나 없이 온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이고 있다.


투명하기조차 하다.

아무것도 가리지 않아 뒤쪽 나무와 산과 색을 품은 나무들을 다 볼 수가 있다.


문득, 내가 지금 서있는 이곳은 어디인가... 아득해진다.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귓속에 길고 낮게 퍼진다.


두 개의 계절이 함께 있다.

이들의 조화로움은 기분 좋다. 사이좋은 가족을 보는 것 같다.


가을 숲 맑은 물에 하늘과 나무와 사람들의 눈길이 머문다.


액자에 넣어 두고 싶은 풍경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길은 어린 날 보았던 세상처럼 낯설고 새롭다.


선운사 동백나무 숲으로 갔다.

동백은 10월부터 꽃이 들기 시작해서 이듬해 2월에 꽃이 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피어날 꽃몽우리가 나무에 가득 열려있다.

봄이 오면 온 산과 숲을 붉게 물들일 동백꽃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오래된 감나무에 가지가 휘도록 감이 열려 있다.

세월을 견디고 근육만 남은 남자가 절규하듯 내어 놓는 마지막 열매. 주홍의 감!


선운사 입구까지 나오니 넓은 생태공원이 보인다.

붉은 단풍 아래 초록색 수선화 밭이 인상적이었다.


나오며 돌아보니 살포시 하루 해가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