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진다.
오늘의 시름과 기쁨과 애달픔을 안고 붉게 저무는 하늘.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퇴근길,
차를 그대로 몰아갈 수 있는 곳이 근처에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다.
유월의 탄도항
저녁 7시 50분쯤 해가 지는 계절이라 퇴근하고 바로 달려가면 일몰을 볼 수 있다.
1시간 남짓 달려가는 마음은 자유롭고 사무실 생각은 저만큼 달아난다.
탄도항 입구
건물로 가득 차 있던 세상이 하늘과 땅과 바다로 가득 찬다.
바다로 가는 길 한쪽은 물이 빠져 쩍쩍 갈라진 메마른 땅.
이곳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답다. 땅 위 하얗게 보이는 것은 소금이다.
다른 한쪽은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습지, 물의 위대함을 느낀다.
습지 위로 빛을 품은 구름이 몰려온다.
메마른 땅 멀지 않은 곳에 물이 찰랑이는 바다가 있다.
구름은 조금씩 물들어 가고 저녁나절의 선선한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저 멀리 풍력발전기 그림같이 돌아간다. 바다 위 하늘은 구름으로 가득 차 있다.
무심히 보고 있자니 이름 지을 수 없는 감정들이 차 오른다.
수평선 너머로 나타난 붉은 줄이 서서히 띠를 이룬다.
구름 속에 지는 해가 들어 있다.
바다에 긴 그림자를 남기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하늘색 하늘에 뜬 흰 달
나무가 되고 싶은 걸까.
천천히 해가 진다.
먹먹하고 달콤한 슬픔이 함께 찾아오는 박명의 시간.
"개와 늑대의 시간"
밤의 푸른색과 낮의 붉은색이 만나 다가오는 형체가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대를 프랑스에서는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시간 안으로 들어간다.
붉은 기운은 바다에 퍼지고 구름은 수평선에 퍼진다.
저 멀리 인가의 불빛이 보인다. 불빛은 어두울수록 밝게 반짝인다.
해는 지고 불빛은 멀어지고 구름도 어둠 속에 몸을 숨긴다. 그렇게 밤이 되었다.
가을의 탄도항.
10월은 6시 18분쯤 해가 진다.
5시쯤 출발해야 지는 해를 볼 수가 있다.
지는 해를 보는 일이 역사적 사명도 아닌데 그 쓸쓸한 순간을 위해 열심히 달려서 도착한다.
풀 한 포기 없는 갈라진 땅.
멀리 우주여행을 떠났다가 멸망한 지구에 돌아온 기분이다.
연둣빛이었던 초여름의 습지는 갈대숲이 되었다.
석양빛에 붉게 물든 갈대의 모습이 아름답다.
메마른 땅 바로 옆에는 바닷물이 조금 들어온다.
그곳에서 생명들이 온몸으로 가을을 맞고 있다.
해가 지는 건지 뜨는 건지 알 수 없는 풍경이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뜨는 것처럼 진다.
주홍색 빛을 남기며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간다.
언제부터 서있었던 걸까.
등이 굽은 커다란 사람 하나 미동도 없이 지켜보고 있다.
아름답지 않은가.
가운데 하얀 곡선은 바다에 난 길이다.
물이 빠지면 사람의 길이 되고 물이 들어오면 물의 길이 되는 곳.
뒤돌아 본다.
언덕 위에 올라 걸어 나온 바닷길을 본다.
언젠가 이렇게 살아온 날들을 한 장면으로 볼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아쉬움과 그리움, 슬픔과 회환을 품고... 행복했던 기억도 떠올리면서
세상에 밤이 찾아왔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따뜻한 일인가.
어렸을 때 엄마가 화나서 때리려고 하면 나는 바로
도망을 쳐서 우리 집이 보이는 맞은편 야트막한 언덕에 앉아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괜스레 서러워져서 훌쩍훌쩍 울기도 했다.
밤이 이슥해지면 전화기도 없던 시절이라 엄마와 아빠가 갑자기 문밖으로 나와서 이곳저곳을 찾아다닌다.
몸짓에서 당황한 기색이 느껴진다. 심지어 아빠는 굴다리를 지나 시장 쪽으로 갔다 오시기도 한다.
엄마는 내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며 옆집이나 논둑길을 헤매고 다닌다.
나는 어둠 속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처음에는 나를 혼낸 엄마가 고생하는 모습에 고소한 심정이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집에 들어가고 싶어졌다. 따뜻한 이불속이 그립고 배도 고팠다.
그러나 들어가면 더 혼날까 봐 망설인다.
앉아 있는 풀숲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슬슬 무서워지기까지 한다. 뒤쪽으로 기차가 지나가면 천둥 같은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멀리서 시장까지 갔다가 나를 못 찾고 돌아오는 아빠의 낙담한 모습이 보인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진 나는 일어나서 최대한 천천히 집으로 들어간다.
엄마 아빠는 꾀죄죄한 모습으로 나타난 나를 망연자실한 얼굴로 보다가(이걸 혼내 말어 하는 험악한 표정) 엄청나게 큰 한숨을 쉬고 밥 먹고 얼른 자라고 한다.
그때 따뜻한 이불속에서 느꼈던 안도감과 행복감...
집이란 그런 곳이었다.
이제 엄마의 집과 나의 집이 같지 않은 지 이십 년이 넘었다. 해가 지는 모습처럼 쓸쓸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