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구시포에서 고창 CC까지
어느 봄날 방송을 보고 있는데
배낭을 멘 두 사람이 바닷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왔다.
부서지는 햇살 속에서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며 바닷길과 들판길, 낮은 산길, 논길, 마을길을 이어서 걸어가고 있었다.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가자! 걷자!
그들이 걸었던 길은 서해랑길이었다. 해남 땅끝마을에서 시작해서 서해 바닷길을 쭈욱 따라 인천까지 가는 경로이다.
기차로 정읍까지 가서 택시를 타고 고창까지 갔다.
고창 구시포 해변에서 출발해서 돌아가는 기차시간까지 걸을 작정이다.
구시포 해변
논과 밭을 지나 갑자기 펼쳐지는 드넓은 하늘과 바다에서 봄바람이 불어온다.
눈이 부시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해변에서 풍경이 되었다.
도시에서라면 좁은 놀이터에서 불안스러운 눈빛으로 아이들을 지켜보았을 텐데
이곳에서는 아무 걱정 없이 아이들을 바라보며 모래사장을 거닐 수 있다.
때때로 얼굴을 스치는 바람과 파도소리가 아득하게 들리는 이곳은 다른 세상이다.
바다를 왼쪽에 두고 걷는다. 보리의 움직임이 바람의 존재를 알려준다.
물 빠진 갯벌과 초록의 보리와 새잎이 나기 시작하는 나무가 조화롭다.
길은 걸어야 길이다.
수많은 사람이 걸어서 길이 되었다. 내 작은 한걸음이 길이 되기도 한다.
길 위에는 많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어린 시절 외딴 동네에 살았던 나는 거의 한 시간 가까운 길을 걸어 학교에 갔다. 도로와 공장을 지나고 논길을 걸어 친구들 집이 있는 주택가를 지나고 길 위에서 친구들을 하나둘씩 만나기도 하면서 기나긴 등교를 했다.
하굣길은 더 길었다. 급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거의 친구집에 들르거나 공터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어둑해질 무렵 집으로 들어갔다.
학교에 행사 같은 게 있어서 점심 도시락도 먹지 않고 하교를 했던 어느 날, 자연스럽게 같이 가던 친구의 집에 놀러 갔다. 그 친구의 집은 부유한 주택가였고 집에는 식모언니가 있었다.
우리가 점심을 안 먹었다고 하니 식모언니가 밥을 차려주었다. 친구에게는 새로 한 따뜻한 밥을,
나에게는 친구가 먹지 않고 가져온 도시락을 주었다.
어리기도 하고 노는데 정신이 팔려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빨리 놀아야 했으므로... 그러나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좀 서럽기도 했다. 그 이후 나는 그 친구집에 다시는 가지 않았다.
길은 이런저런 생각을 봄의 새싹들처럼 되살아 나게 한다. 서러운 기억조차도...
그럼에도 나는 이 아름다운 길을 걷고 있는 나름 괜찮은 어른으로 성장했다.
그러면 된 것이다.
나무의 모양을 보면 바람의 방향을 알 수 있다.
나무들이 연초록 잎을 틔우며 바닷바람에 길을 내주고 있다.
간간이 보이는 서해랑길 주홍색 표지가 없어도 길을 잃지 않는다. 걸어갈 수 있는 길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단순함이 좋다.
단순함은 집중하게 하고 깊이를 가능하게 한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신발을 벗어 가방에 묶고, 맨발로 걷기 시작한다. 이 상태로 2시간 이상을 걸었다. 신발을 신었을 때보다 훨씬 편안하고
발바닥에 느껴지는 다채로운 감촉이 기분 좋았다.
뻘처럼 진득한 모래는 발바닥을 부드럽게 간지럽히고, 고운 모래는 살폿한 거칠음으로 발바닥을 시원하게 해 준다. 거친 모래는 신발안에 갇혀있던 발에 새로운 자극을 준다.
바다를 걷는다.
온몸에 각기 다른 바람을 맞으며 걷는다.
하늘과 바다와 먼산과 모래들.
해변은 물이 다녀간 흔적을 모래와 조개껍질의 크기로 간직하고 있다.
조개나 바지락을 캐는 사람들이 보인다. 가지고 온 주머니가 금세 불룩해지는 모습이 신기했다.
갯벌 안에는 생명들이 가득하다. 밟으며 걷기가 미안할 정도로...
해변의 뻘이 만든 색다른 풍경.
부드럽게 굴곡진 흙의 감촉이 발바닥에 닿으면
표현할 수 없는 말랑한 감정들이 몰려온다.
우연히 박힌 쇠기둥에 굴이며 따개비가 셀 수 없이 달려 있다. 많은 시간 동안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간 흔적들.
나라는 존재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내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과 겪었던 일들과 감정들이 모이고 모여 내가 되었을 것이다.
내가 겪은 슬픔과 기쁨, 외로움과 두려움, 작은 감동과 가슴 벅참. 그 모든 것들이 알 수 없는 규칙으로 섞여 이루어진 것이 나이다.
무엇이 다녀간 것일까
이리 고르고 아름다운 무늬를 해변에 남긴 이는 누구인가.
걷는다.
바라본다.
바람이 불어오고 가슴 가득 맑은 물이 차오른다.
다양한 풍경이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바다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저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을 얼굴 가득 맞는다.
시원하다. 응어리진 무언가가 날아가는 느낌이다.
한참을 걷다 언덕에서 잠시 쉬었다. 커피와 간식을 먹으며 바다를 바라보고 몸안 가득 들어있던 힘을 천천히 빼는데 알 수 없는 충만감이 밀려왔다.
하늘은 맑고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간간이 물소리가 들리는 이곳.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만이 명료한 사실이다.
바다는 하늘을 닮아 있다.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를 보며 걷는다.
늦은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봄볕을 맞으며 앉아 있다가 다시 걷는다.
습지가 나타났다. 아직 새잎을 내지 못한 갈색의 풀들이 풍경에 입체감을 준다.
걷는다.
봄날의 햇살이 온몸을 비추고 바다는 반짝이고 바람은 기분 좋게 불어온다.
미술반 시절 많이 그렸던 어선의 모습이다.
저 멀리서 배우가 걸어 나올 것만 같은 바닷가 풍경.
문득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해준(박해일)의 자부심을 자신이 붕괴시켰다고 생각한 서래(탕웨이)는 바닷가 모래 속에 스스로를 유폐시킴으로써 해준의 자부심을 돌려주고자 한다.
서래와 해준의 감정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장면.
"내가 품위 있댔죠? 품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요? 자부심이에요. 난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할머니 폰 바꿔 드렸어요, 같은 기종으로. 전혀 모르고 계세요.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 해준
.
.
.
"이걸로 재수사해요.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요." - 서래
서래가 사라진 바닷가
(그 바닷가를 드론으로 찍었다)
나란히 서있는 그들의 자동차와
모래 속에 스스로를 유폐한 서래의 옆모습 같은 물결이 밀려온다.
서래가 사라진 바닷가에서 해준.
영화가 끝나고 오랫동안 먹먹했다.
영화는 신기루같이 끝나고 내 눈앞에는 풍경만이 남았다. 마침내.
고창 CC까지 걷고 나서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다시 이어서 걸으리라 결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