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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 Apr 03. 2024

봄비 오는 날 아침산책

4.3

봄비가 내린다.

오늘도 별다방에서 커피를 사서 출근길에 있는 공원에서 잠시 산책을 했다.


공원이 서쪽지역이라 맑은 날은 해가 비쳐 산책을 하고 나면 얼굴이 뜨거웠다. 오늘처럼 비 오는 날이 오히려 걷기에 좋다. 우산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어린 시절 양철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들던 날을 떠올리게 한다.


청신한 빗소리와 촉촉이 젖은 대기 속에서 깊이 숨쉬기를 해본다. 마음속 찌꺼기가 밖으로 몰려나가는 느낌이 든다.



이틀 전만 해도 꿈쩍도 않던 나무에서 새잎이 나오기 시작한다. 벚꽃도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환한 얼굴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누군가 마시다 두고 간 음료수 한잔이 의자에 덩그마니 놓여있다. 무슨 급한 일이 있었던 걸까... 취업이 되었다거나 하는 기쁜 소식을 듣고 달려가느라 두고 간 것이기를...



어르신 한분이 우산을 쓰고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바쁘게 내 앞을 스쳐서 지나간다. 저 검은 비닐봉지에 무엇이 들었을까 혼자 상상해 본다. 공원 근처에 있는 직장에서 밤샘 근무를 마치고 부지런히 집에 가시는 것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걷는다. 봄비는 계속 내리고 눈에 닿는 모든 것에 생명력이 넘친다.



빗물을 머금고 몽우리 진 벚나무 줄기가 휘영청 호수에 드리워져 있다. 하루이틀사이 그 환하디 환한 미소를 보여줄 결심을 한 듯하다.


나뭇가지 사이로 봄이 보인다.



흐린 날의 개나리꽃은 그 노란색을 더욱 선명하게 뿜어낸다.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아이들처럼 신이 났다.

 


커다란 꿀밤 나무아래서~~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가 생각나는 나무.

여기서 '꿀밤'은 굴참나무 열매를 가리키는 ‘굴밤’이 된소리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산책을 마치고 비가 와서 차 안에서 커피를 마셨다. 비는 점점 거세지고 커피향기는 차 안에 가득하다.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다 문득 라디오를 틀었는데... 지금부터 76년 전 4월 3일


제주 4.3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에서 일어난 무력충돌, 국가폭력으로 민간인 7만여 명이 희생되고 3만여 명이 실종된 비극적인 사건.  


봄인데 비가 이리도 추적추적 길게 내리는 이유가 갑자기 느껴졌다. 제주 4.3에 대한 책을 읽고 영화를 볼 때마다 그 참혹함에 며칠 동안 가슴앓이를 하곤 했다.


20대에 처음 접한 제주 4.3은 현기영의 '순이삼촌'이었고, 오멸 감독의 '지슬'을 보며 목이 아프도록 메어왔었다. '지슬'은 제주도 방언으로 '감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먹먹해서 한참 동안 책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살아남은 분들은 그 참혹한 세월을 어찌 견디셨을까... 그분들의 눈물처럼 비가 내린다.


아픈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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