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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려라하니 Jun 27. 2024

일상에서 얻다 3

구멍


구멍


바다는 갯벌 위에 은빛 비늘로 퍼덕인다. 파도는 흐르는 바람을 타고 올랐다 내렸다 한다. 마치 나를 부르는 손바닥의 유희처럼 보였다. 다시 나를 이곳으로 불렀다. 조명 주위로 맴돌기만 하는 나방마음이 이러할까.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 칠수록 나는 바다를 더 찾았다.

​질퍽한 회색빛 뻘 위로 선들이 그어져 있었다. 누구의 흔적 끝에는 작은 구멍들이  있었다. 주위로 흙이 소복하게 쌓였다. 누가 이런 것을 그려놓고 만들어놓았을까 하는 의문도 잠시, 이 넓은 곳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자연을 손댈 수 있는 것은 인간만이 가능하다는 착각이었다.

손가락으로 선을 따라갔다. 문장의 마침표처럼 동그랗게 찍힌 구멍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구멍은 내 손가락만큼 조금씩 넓어지다 주먹크기로 커졌다. 다섯 손가락을 마구잡이로 집어넣어 흙을 파내었다.

​차갑지만 따뜻했다. 손바닥에 닿을 때마다 생명의 맥박이 느껴지는 듯했다. 진흙은 밀도 높은 크림 형태로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졌다. 바다의 갯내와 물기가 촉촉하게 피부로 스며들었다.


손가락 끝에서 물컹한 것이 만져졌다. 알지 못하는 목적지로 향하는 것은 속도를 내달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손에 만져지는 감촉은 더 이상 파낼 수 없다는 정지의 신호였다. 그제야 파도의 체로 걸러진 회색의 진흙들이 내 몸에 잔뜩 묻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손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물컹한 무엇은 손을 빼냄과 동시에 함께 따라서 꺼내졌다.

​길고 가늘다. 갈색 같기도 하고 붉은색으로 보이는 것은 바다가 색을 고이 색칠해 놓았음이다. 어느 화가의 추상화처럼 이해되지 않는 모습이지만 그 또한 자연이 붓으로 그린 것이다. 붓끝에 달린 강모들이 바로 이 몸통에 그대로 옮겨 붙었다. 손으로 집어 올렸지만 곧 축 늘어졌다. 그것이 있던 자리에는 물웅덩이가 생길 정도로 움푹 파졌고 주위로는 흙이 수북하게 쌓였다. 무더기 위에 사뿐히 얹어놓았다. 움직임이 없을 줄 알았던 것은 바다의 갯내에 힘을 얻어 조금씩 꿈틀대기 시작했다. 흉측해 보일지 모른다. 징그럽다고 고함지를 수도 있다. 생명체는 살기 위하여 움직이고 있다. 자기가 나왔던 구멍을 찾아서 가는 삶의 연동운동이었다.



구멍 모양에 따라 숨겨져 있는 것들이 다르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익혔다. 누가 알려주었던 것도 아니었다. 여기저기 파헤치다 보니 저절로 알았던 것이다. 어린 소녀였던 내 발바닥을 간지럽히던 것들, 파도가 일으킨 거품, 시곗바늘처럼 규칙적인 파도 소리. 이 모든 것들 속에서 나는 무수한 구멍을 발견했다. 그리고 구멍 속에 미세한 떨림을 찾아서 파헤쳤다.

​구멍은 텅 비워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단순히 장난 같은 놀이를 넘어선 일이다. 생명의 숨길이고 자신을 지키기 위한 피난처였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살기 위해 구멍을 만들고 찾는다.

바위 틈새 구멍에는 작은 게가 구멍을 팠다. 조개는 모래 속에 깊은 구멍을 파고들었다. 그것을 찾아 나는 또 구멍을 손으로 헤집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구멍을 찾아 헤매는 여정이다. 끊임없이 발견하고 미세한 떨림을 찾음으로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렇다. 바다는 나에게 삶의 구멍을 만들어주는 공간이었다. 찾지 않기 위해 온몸으로 거부했던 발버둥은 사실 내 존재를 알리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삼십여 년이 흐른 지금에서 알았다. 내 숨통을 트여줄 구멍을 찾아 나는 바다로 향했던 것이다.


살기 위해 구멍을 만들고 살기 위해 구멍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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