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렌즈를 통해 보고 있는지 먼저 확인하기
이 그림 속 토끼를 보고 어릴 때 좋아하던 ‘보름달’ 빵이 떠올랐다. 하얀 생크림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둥근 모양의 카스텔라 빵이 샌드위치처럼 포개어 있는 빵이었다. 포장에는 달에서 사는 토끼 둘이 마주 보고 절구질을 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대낮처럼 휘영청 밝은 달을 배경으로 꽃밭에 있는 토끼를 표현한 그림이 보름달 빵 속에 토끼랑 연결되었던 것 같다.
좋아하는 여성 듀오 ‘제이 래빗’에도 이름에 토끼가 들어간다. 이 가수의 노래 중에 ‘Happy Things’라는 노래를 특히 좋아하는데 이렇게 시작한다.
‘둥근 해가 뜨면 제일 먼저 기분 좋은 상상을 하지
하나 둘 셋! 자리에 일어나 하마처럼 입을 쫙~ 하품을 한번 하고
두 눈을 크게 뜨고 번쩍 기지개를 한번 쭉 펴고
즐거운 상상을 맘껏 즐겨 잊지 말고
Happy Happy Things!’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상상하며 하나씩 나열해 나간다. 그런데 그 내용이 하나 같이 정말 작고 소소한 것들이다. 상상이라고 하면 이루어지지 쉽지 않은 어려운 것이나 거창한 것들을 떠올릴 법도 한데 일상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리는데 듣고 있으면 나 역시 가사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예를 들면 이런 일들이다.
‘좋아하는 노랠 들으며 걸어갈 때, 시간 맞춰 버스를 탈 때, 유난히 사람이 많은 출근길, 딱 내 앞에서 자리 났을 때,’
하루에도 한 번쯤은 경험할 법한 일들이 기분 좋은 상상이 되고, 그런 상상이 실현될 때 행복해지는 것을 노래한다. 몇 년 전부터 유행어처럼 자리 잡은 ‘소확행’이라고 할까. 대단한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조금만 주변을 둘러보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작은 행복들이다. 여기에 나의 소소한 행복을 조금 더 보태자면, 진하게 로스팅된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는 것, 작업하다 지칠 때 잠시 휴식하며 먹는 콘 아이스크림,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들어와 따뜻한 물로 샤워하는 것들일 것이다.
하지만 노래 가사에서 제일 마음에 남는 드는 부분은 1절 가사에 있는 ‘이제부터 뭐든 내 멋대로 맘먹을 때’와 ‘그대가 내 맘 알아줄 때’이다. 무엇이든 멋대로 하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작은 행복 같지만, 결코 작은 행복이랄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아직은 부모님이나 성인의 보호가 필요한 어린 아이나 청소년들의 경우는 제외하고 누구나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다. 당연히 그 행동에는 책임이 따르는 것이고.
예전에 1년 동안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수련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그곳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있음을 경험했다. 내가 세상을 사람을 보는 관점을 많이 바꾸어 놓은, 진짜 수련의 시간이었다. 그전까지 얼마나 좁고도 얕은 시선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아 왔었는지 깊이 반성하게 했다.
상담은 좁은 의미로 보면 해결해야 할 문제나 갈등이 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 과정이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학습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니 특정한 어려움에 부딪힌 사람뿐만 아니라 일반인 누구나 상담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의 스펙트럼은 훨씬 넓었다. 약간의 지지와 격려만으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부터 의학적인 도움을 집중적으로 받아야 하는 분, 적극적인 치료적인 개입이 필요한 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사람들이 대신 해결해 주는 일들이 반복되면서 스스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놓아버린 사람. 열심히 노력해서 뜻한 바를 이루었지만 주변으로부터 비난과 상처를 받아 잔뜩 화가 나 있는 사람. 가시밭길과 낭떠러지일 거라 지레 짐작하고 어느 쪽으로도 발을 내딛지 못해서 두려워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 스스로 자신 앞에 놓인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책임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았다. 당연한 듯 생각했지만 그런 당연한 듯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Happy Things’ 가사 속 ‘내 멋대로 마음먹는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도 읽힌다. 물론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마음먹고 이루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하고, 책임도 져야 할 테지. 하지만 나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피하려다 보면 절대 내 멋대로 마음먹는 행복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책임을 피하려다 보면 나의 일을 남이 생각하고, 남이 판단하게 된다.
행동은 내가 하고, 결과에 따른 책임도 내가 져야 한다. 생각하고 판단한 것은 다른 사람이 했을지라도 결국 그건 나의 인생이니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게 되더라도 그래서 기대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결과의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지울 수 없다. 어쩌면 정말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나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 깊이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고 책임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모두. 그러니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스스로를 많이 응원하고 격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누군가가 있을 때’ 정말 기뻐하고 행복할 수밖에. 그러니 이건 결코 작은 행복이 아니다. 말하자면 토끼가 방아 찧는 봉지 안에 담긴 보름달 빵에서 얻는 행복이 아니다. 진짜 보름달을 바라보면서 토끼가 사는지 아닌지를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 우주선을 상상하고 달에 가보기 위해 실현하는 과정에서 얻는 행복에 가까울 것이다.
상담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느꼈다. 심리학은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것이니 현미경 같다고.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관찰하기 위해서 현미경을 사용하는 것처럼 심리학이라는 렌즈로 사람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촘촘하게 깊이 들여다본다고 그 대상을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사람의 경우는.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마음속도 들여다보아야 하지만, 그 사람이 놓인 상황과 배경은 물론 사회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사회를 연구하는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망원경으로 비유할 수 있다면, 한 사람을 이해하는데 현미경과 망원경이 둘 다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다. 어쩌면 이 세상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현미경으로 보고 망원경으로도 볼 때 좀 더 깊고 넓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수동 카메라로 사진 찍는 법을 배울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망원렌즈는 초점거리가 길어 인물에 초점을 맞추면 배경이 흐리게 보인다. 찍고 싶은 대상이 또렷하게 보이니 인물 사진 찍기에 좋다. 하지만 멀리 있는 풍경을 화면 가득 담고 싶을 때는 망원렌즈가 아닌 광각렌즈가 필요하다. 초점 거리가 짧아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화각이 넓게 보이기 때문이다. 사진을 잘 찍기 위해서는 대상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 특징을 잘 담을 수 있는 렌즈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사람의 시야와 가장 흡사하다는 표준렌즈로 충분히 대상을 이해한 후에 다른 렌즈들의 쓰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 더 중요하겠지만.
내가 무언가를 볼 때 육안인지 혹은 현미경이나 망원경을 통해 본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표준렌즈로 바라보는 세상과 망원렌즈나 광각렌즈로 바라보는 세상은 분명히 다르니까. 무엇을 보고 싶은지, 무엇을 통해 보는지를 모두 알아야 제대로 볼 수 있을 테니까.
작고 확실한 행복은 중요하다. 즉각적이고 손해 없는 확실한 보상은 탄수화물처럼 바로 에너지를 만들어 주니까. 하지만 불확실하고 많은 노력이 드는 과정도 분명히 행복과 연결될 것이다. 열매를 얻기까지 더디게 느껴지고 중간에 때로는 손해를 볼 수도 있겠지만 꾸준히 하다 보면 장기적으로는 분명히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투자가 될 테니까. 나무는 자라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뿌리가 깊다. 향기가 좋고 화사한 꽃처럼 방안을 환하게 해 줄 수는 없어도 늘 그 자리에서 더 풍성한 잎과 더 넓은 그늘을 만들어 놓고 누군가를 기다릴 것이다. 보아야 할 것에 맞는 렌즈, 품고 있는 씨앗을 틔우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 다를 뿐이다.
토끼는 천체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눈 속에, 추억 속 빵 포장지에, 귀여운 노래를 부르는 가수 이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