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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의 나무 Jan 03. 2024

암환자의 식탁, 샤인 머스캣

참지 말아요, 드실 자격 충분 합니다.  

 

2020년 12월 9일, 간병살림인의 하루


동네에 마트가 새로 문을 열었다. 가장 가까운 대형마트가 1.2km 거리에 떨어져 있는 데다가 마트 가는 시간도 절약할 때라 반가웠다. 상품 전단지를 들여다보며 오늘은 무엇을 살까 정하는 것이 일과 중에 하나가 되었다.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오늘 가장 많이 할인하는 것, 평소보다 가장 저렴한 것들을 위주로 품목을 정하곤 했다. 


그러던 중에 눈에 들어온 상품은 ‘샤인 머스캣’. 

사진으로만 봐도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웠다. 빛깔도 상큼한 것이 먹지 않아도 달콤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할인 가격에 판매하는 것임에도 가격이 만만치는 않았다. 여느 때 같았으면 그저 한 번 보고 지나쳤을 것이다. 아니 마트 전단지를 눈여겨보는 일도 드물었으니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왠지 그 과일에 계속 시선이 갔다. 


아침 식사를 챙기고 설거지를 마치자마자 마트로 향했다. 그날그날의 가장 주요 할인 상품은 서두르지 않으면 일찌감치 동나는 것을 며칠 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아삭이 고추와 항암에 좋다는 브로콜리를 샀다. 그리고는 샤인 머스캣. 부지런히 나선 덕분인지 상자에 담겨 차곡차곡 쌓여 있는 샤인 머스캣은 신선한 것으로 고를 수 있었다. 직접 보니 사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알이 굵고 윤기가 도는 것이 사진만큼 먹음직스러웠다. 고민할 것도 없이 그중에서 가장 싱싱해 보이는 것을 골라서 계산을 했다. 손가락으로 오케이 모양을 할 만큼의 큼지막한 포도알들이 촘촘히 달려 있는 데다가 한 상자에 세 송이가 담겨 푸짐했다. 계산을 마치고 들고 나오는데 코 끝에 향기마저 기분을 들뜨게 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만약 엄마가 장을 보셨다면 어땠을까? 보기만 해도, 향기만 맡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이과일을 선뜻 장바구니에 담으셨을까? ‘일반 포도나 거봉도 얼마나 맛이 좋은데...’하시며 비싼 샤인 머스캣은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을까? 그렇게 아끼고 아껴서 다른 반찬 값에 보태지는 않으셨을까? 


그렇게 아끼고 절약한 반찬 값으로 어릴 적 나의 학비에 보태고, 생활비에 보태며 살아오셨을 것이다. 당신 입에 맛 좋은 음식 한 번 덜 드시고, 당신 갖고 싶은 것 하나 덜 사시면서. 나를 위해, 가족을 위해 살아오셨을 것이다. 이제는 맛 좋은 것 마음껏 사 드셔도 될 만큼 지갑은 여유 있지만 마음껏 드실 수가 없다. 수술로 줄어든 위와 충분히 제 기능을 회복하지 못한 내장 기관 기능 탓에 양껏 드시지도 못한다. 그래서 더더욱 조금이라도 드실 수 있을 때 뭐든 드시게 하고 싶었다.


샤인 머스캣 한 송이를 씻어서 간식으로 냈다. 어쩜 이렇게 포도알이 굵으냐며 연신 감탄을 하셨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이 포도는 비싼 거 아니냐. 거봉도 맛있는데.. '


라고 하셨다. 


'우리도 이제 이런 거 먹어도 돼. 맛 좋으면 사 먹는 거지. 어차피 많이 못 드시는데 다른 것 두 송이 드시는 셈 치고 이거 한 송이 드시면 되고. 어서 드셔 보셔.'  


한 알을 입에 넣으시는 것을 보는 것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꿀꺽 삼키시고는 하시는 말, 


'야야, 설탕이라도 넣은 것 같다. 엄청 맛있네. 향기도 좋고... '


엄마가 환히 웃으셨다. 내게도 미소가 번졌다. 





달콤함도 상큼한 향기도 오래가지는 않지만 그날 엄마의 미소와 그 순간의 행복한 느낌을 오래 기억하려고 몇몇 지인들에게만 공개하는 SNS에 기록을 남겼다. 에피소드를 본 며칠 후, 한 후배로부터 택배가 도착했다. 코로나 때문에 병문안을 오고 싶어도 마음만 전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달콤함에 다정함까지 신선함 속에 고스란히 담겨왔다. 


힘들다고 투정을 많이 부려서인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와 은혜를 받으려니 한편으론 빚지는 기분이다. 그래도 그 마음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던가. 잘 담아둔 마음 이자까지 셈해서 언젠가 꼭 보답할 날이 있겠지. 글을 쓰다 보니 새삼 그날의 감사함에 마음이 닿는다. 


오늘 새해 안부라도 전해야겠다. 





학기 말에 연말까지 겹쳐서 눈앞에 일들을 처리하느라 시간이 훌쩍 지났다. 부지런히 쓰는 것도 아니면서 다시 쓰기까지 또 시간이 걸린다. 다시 워밍업 하는 느낌이지만, 또 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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