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언젠가 문체가 만들어지는 날이 올까?
고등학생 시절, 소설을 쓰는 한 친구가 내게 물었다.
“너는 소설에서 소재와 표현 중 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소설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와 어떻게 그 내용을 표현해 내는지 중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소재가 더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일단 내용 자체가 흥미롭고 특별해야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별로 눈에 띄는 점도 없는 평범한 내용을 담은 소설은 지루하고 별다른 메시지도 전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의 말을 듣더니 친구가 다시 말했다.
“나는 소재보다는 표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무엇을 표현하느냐보다도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더 중요하단 말이지. 아무리 사소한 소재라고 해도 표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좋은 소설이 될 수 있어.”
-어떤 생각들은 나의 세계가 된다. 이충녕. (pp.57-58)
새해 들어 읽은 첫 책의 일부이다. 저자의 친구가 같은 질문을 나에게도 했다면 아마 저자의 답과 같았을 것이다. 글쓰기에서 새로운 이야깃거리는 요리에서 새로운 재료만큼 특별한 가치가 있을 테니까. 맛있는 요리의 가장 기본은 신선한 재료인 것처럼 글을 쓸 때 어떤 내용으로 써내려 갈 것인지의 기본은 소재가 반 이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조금 더 읽다 보니 저자 친구의 말처럼 무엇을 표현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라는 의견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별 재료가 아니어도 뚝딱 맛있는 것을 만들어 내시는 살림 9단 엄마에 비하면 아무리 신선하고 좋은 재료가 있어도 나 같은 사람에겐 아까울 뿐이니까.
생각해 보면, 공개적인 플랫폼에 글쓰기를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의 시작은 엄마의 간병이었다. 그전까지 경험하지 못한 힘든 시간을 보내던 중에 나와 비슷한 생활을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며 위로를 받는 느낌이 들었다. ‘나 혼자만 이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구나.’ ‘같은 경험을 나누는 것이 힘이 되는구나.’ 이런 생각에 닿으니 나도 언젠가 기회가 되면 누군가와 경험을 나누고 싶었다.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에서는 좀처럼 엄두 내지 못했지만 연대하는 마음의 힘을 느끼고 나니 뭔가 새로 시작해 보자는 용기가 생겼다.
그런데 실상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전까지 겪지 않았던 경험을 한 것까지는 좋은데, 어떻게 그런 내용을 풀어가야 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일기도 아니고 메모도 아닌 글쓰기는 결국 또 다른 역량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었다. 전문적인 작가도 아니면서 글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문맥이 어색한 것 같아서,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기본적인 문장 호응조차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이 문제는 진행 중이다.)
앞에 인용한 책을 읽다 보니 며칠 전 본 영화도 떠올랐다. 2022년 반 클라이번 피아노 콩쿠르 이야기를 다룬 ‘크레센도’라는 영화였다. 2022년 우승자는 우리나라 임윤찬 씨였는데, 당시 연주에 대한 엄청난 호평이 쏟아졌던 것이 생생하다. 마침 이 대회가 1962년에 시작되어 60주년을 맞은 것을 기념하는 특별한 영화까지 제작되었다고 해서 관심이 갔다. 클래식 음악을 잘 알지 못하는 나도 우승 당시 연주를 찾아 듣고 깊은 감동을 받은 터라 한달음에 영화관으로 달려갔다.
영화는 영화제 자체를 다룬 다큐멘터리답게 수상자뿐만 아니라 참가한 여러 연주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무려 3주간의 일정 동안 이어지는 대회가 이어진다는 것도 알았고, 그 과정에서 느끼는 긴장감과 백스테이지 모습까지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수상 당시 뉴스는 결과를 중심으로 보도했기에 다른 참가자들이 어떤 곡을 연주했었는지는 알지 못했는데, 이럴 수가! 최종 6명이 오른 마지막 결선에서 무려 3명의 연주자가 ‘라흐마니노프 3번’을 연주했다는 것을 알았다. 임윤찬 씨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금메달까지 받은 그 곡을 말이다. 결선 무대 오를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갖춘 연주자들이 서로 다른 곡도 아닌 같은 곡을 연주하면서 어떻게 연주해서 우위를 가릴 수 있었는지... 결과만 알고 있던 나로서는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오니 새삼스럽게 참가자들의 연주가 더 궁금해졌다. 임윤찬 씨의 연주는 예선부터 결선까지 연주곡을 다시 한번 찾아들었다. 도중에 결선에서 같은 곡을 연주한 세 연주자의 연주를 비교한 영상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흥미로웠다. 그야말로 아주 미세하고 작은 차이지만 분명히 느낌이 다른 연주를 하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세 연주자는 자신의 개성을 살려 자기만의 연주를 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어느 연주자의 연주가 더 좋고, 어느 연주가 아쉽고를 구분할 만큼의 소양은 갖지 못했지만 확실히 차이는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임윤찬 씨의 연주는 들을 때마다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힘든 특별한 마음의 울림이 있었다.
엄마를 간병하는 경험은 내겐 특별했다. 하지만 그 경험조차 나 혼자만 겪는 경험은 아닐 것이다. 아픈 가족을 간병하는 것이 극히 소수만이 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닐 테니까. 그런 점에서 내가 읽었던 간병 경험을 다룬 책이 위안을 주었던 것은 단순히 소재만의 특별함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 글에는 솔직하면서도 진지하게, 그러면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은 의연함과 건강함이 담겨 있었다. 단순히 소재가 아니라 그런 다양한 감정과 삶의 자세를 그려낼 수 있는 작가의 표현 덕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나의 경험을 나의 생각과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 낼 수 있을까? 나의 개성은 어떻게 드러날 수 있을까? 과연 나의 글에도 문체라는 것이 갖추어질 수 있을까? 같은 재료를 사용해도 다른 맛을 낼 수 있듯이 나만의 글을 쓰는 날이 올 수 있을까?
거창하고 특별한 소재가 아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소재를 소재로 낭비하지 않고, 소중하게 진심을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보여줄 수 있는 마음은 작아도, 글을 통해 그 작은 마음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삶을 소설에 비유한다면, 우리가 겪는 일들은 곧 소설의 소재에 해당할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 경험을 통해 무엇을 느끼며 살아가는지는 곧 소설의 표현에 해당할 것이다. (……) 삶은 사건들을 나름의 의미를 가진 하나의 이야기로 조직하고 표현해 나가는 과정이다.
-어떤 생각들은 나의 세계가 된다. 이충녕. (p.59)
처음 인용했던 책 같은 장에는 이런 문장도 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들을 그저 꿀꺽 삼키거나 대충 씹어 넘기지 않으면 좋겠다. 오래 꼭꼭 씹어 체하지 않기를, 입안에 잘 머금다가 넘길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 삶 본연의 맛을 깊이 느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