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인의 건강관리: 망치수지가 뭐니? 다형홍반은 왜 또 나와??
‘밥 먹어라.’
아침에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겨우 눈을 뜬다. 일어나자마자 손만 씻고는 바로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나이가 마흔이 지나도 나의 아침 식사는 늘 엄마의 손길을 빌어서 가능했었다. 엄마가 편찮으시기 전까지의 내 삶은 마법에 걸린 신데렐라였다. 식사도 빨래도 청소도 모두 내 몫이 아니었다. 독립을 하고 나서야 구석구석 해야 할 집안일들이 산더미라는 것을 알만큼 무심했다. 주말에 부모님 댁에 가도 겨우 식사 후 설거지 한 두 번 하고는 생색을 낼 수 있었다.
그러던 삶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엄마의 투병 이후로 내게 걸려 있던 마법이 풀려버린 것이다. 세끼 식사만도 쉽지 않았는데 두세 번의 간식까지 챙겨야 하는 상황이라 주방이 거의 일터가 되었다. 엄마는 수술 과정에서 위의 일부가 절제되어 매 끼니 일반 식사량을 드시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항암치료까지 받고 계셔서 기본 열량조차 채우기 힘들었다. 그래도 힘든 치료과정을 버티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체중유지이다 보니 결코 소홀할 수 없는 것이 식사를 챙기는 것이었다.
아침 6:30분에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6시에는 일어나야 했다. 식사 후 설거지와 뒷정리를 하고 잠시 쉬고 나면 간식거리를 챙겼다. 간식으로는 주로 단호박이나 고구마, 달걀 등을 씻어서 삶았다. 옥상에서 잘 익은 방울토마토를 데쳐 껍질을 까고 믹서에 갈거나 식빵을 사서 팬에 구워 토스트를 준비하기도 했다. 코로나 때문에 외식을 꺼리기도 했지만 평소에도 외식은 일 년에 손꼽을 정도여서 모든 음식은 집에서 준비해야 했다. 평소 간장, 된장, 고추장까지 손수 담가 드시던 엄마 입맛에는 조리된 음식의 간이 잘 맞지 않았다. 드시는 양이 적은 것도 내겐 어려운 숙제였지만, 음식 조리까지 흉내를 내야 하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는 차후에 따로 더 해보려고 한다.)
엄마가 편찮으신 동안 코로나로 한참 거리 두기를 시행하고 있을 때라서 맡고 있던 수업은 비대면으로 진행되었다. 모든 생활이 그전과는 달라져서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병원 출입도 어려워서 초반에는 애를 먹은 적이 너무 많았다.) 한편으로는 코로나로 인해 계속 곁에서 간병할 수 있었다. 그래도 독립해서 살던 곳이 지방이었기 때문에 가끔씩은 지방에 다녀와야 했다.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라 조금만 손길을 거두면 티가 났다. 몇 주 만에 가면 화초들이 맥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화분도 몇 개 되지 않고 대부분 목마름도 잘 버티는 식물들이었지만 환기도 안되고 때 맞춰 물 주는 이 없이 버티기엔 2020년의 여름은 너무 길었다. 하얗게 곰팡이가 슬 정도로 집안이 눅눅해지는 바람에 옷장을 새로 사서 공간을 좀 더 넓히기로 했다. 옷장 하나를 구매해서 택배로 주문을 하니 3주 뒤에 배송되는 일정이었다.
몇 주간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바로 다음 날 배송해 준다는 전화가 왔다. 부랴부랴 늦은 저녁 버스를 타고 지방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에 배송되는 시간에 맞추려면 새벽에 나서는 것보다는 늦더라도 밤에 가서 잠을 자는 것이 그나마 낫다고 생각해서다. 오전 8시가 채 못 되어 장롱하나가 배송되어 왔다. 물건을 정리하고 정신없이 학교에 가서 몇 가지 일을 보고 나니 금세 오후가 되었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시간. 바로 다음 날 엄마의 항암치료 일정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퇴근하고 집에 들러서 몇 가지 두고 갈 것과 가져갈 물건들을 챙기고 곳곳을 한 번 돌아보는데, 아침에 정리한 새 장롱이 눈에 띄었다. 작은 방 모서리에 잘 세워져 있는데 조금의 틈도 없이 벽에 딱 붙어 있는 것이 영 거슬렸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너무 벽 가까이 물건을 배치하면 공기가 통하지 않아서 습해질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돌이켜 보면 그렇게까지 바짝 붙어있던 것도 아니고 위치상 습한 기운이 있는 곳도 아닌데 왜 그때는 그 장면이 그렇게 거슬렸는지 모르겠다. 장롱 안에 물건들이 정리되어 제법 묵직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없는 힘 있는 힘을 짜내어 장롱을 밖으로 당겨 내었다. 새끼손가락 하나 정도 들어갈 공간이 생긴 것을 보고 나서야 겨우 뒤돌아 섰다. 흐뭇함과 함께. 그렇게 집 단속을 하고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예약한 버스 시간에 닿으려면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다.
부지런히 걸어서 버스터미털에 도착했다. 가뿐 숨을 내쉬며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갔는데... 이런...! 왼손 새끼손가락 마지막 마디가 맥없이 접혀 있었다. 손을 씻고 닦고 하는 동안에도 전혀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분명히 '통증도 없고 어디 눌린 기억도 없는데, 왜 그렇지...' 갑자기 가슴이 철렁했다.
'어쩌지...? 병원에 가야 하나? 10분 뒤면 버스는 출발하는데...'
'표를 바꿔서 미루고 병원에 들렀다 가야 하나..?'
'지금 서울에 올라가도 집에 가면 8시가 다 될 테니 병원은 문을 닫을 텐데...'
'앞으로 치료를 받으려면 그래도 서울이 낫지 않을까..?'
짧은 시간에 여러 생각이 스쳤다.
'어쨌든 오늘 안에는 올라가야 하니 우선 버스를 타고 보자. 잠깐 신경이 놀라서 그런 걸지도 몰라.'
하며 안심시키며 버스에 올랐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서울까지 오는 동안 내내 새끼손가락이 잘 펴지도록 오른손으로 조심스레 받치고 왔다. 중간중간 한 번씩 받쳤던 손을 빼보았는데 마찬가지였다. 마음속으로는 부디 시간이 지나면 이전처럼 힘 있게 잘 버텨 주기만을 기도했다.
집에 도착해서 엄마에게 손을 보여 드렸더니 깜짝 놀라셨다. 어쩌다 그런 것인지 물으셔도 마땅히 드릴만한 답이 없는 상황이 어이없기만 했다. 추측컨대 장롱을 옮기다가 그런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확실한 건 아니다. 통증은 전혀 못 느꼈으니까. 아쉬운 대로 나무젓가락을 잘라 받치고 반창고를 둘러놓았다. 엄마는 당신 병원 일정 때문에 내가 서두르다가 생긴 일이라고 여기시고는 더 미안해하셨다. 나는 아프지 않으니 무슨 큰일이 있겠냐며 괜찮다고 걱정 마시라고는 했지만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 상황에 조금씩 걱정이 되기는 했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엄마의 항암치료를 위해 서울대병원에 갔다. 오후에 돌아오자마자 집에서 제일 가까운 정형외과에 갔다. 의사 선생님은 딱한 눈으로 들여다보시더니 그래도 응급처치를 잘하고 있었다고 칭찬해 주셨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 엑스레이랑 초음파 검사를 했는데 힘줄이 끊어진 것 같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이런 경우가 제일 까다롭다고 말씀하셨다. 외과적인 치료를 하기에도, 하지 않기에도 애매하다고 하셨다. 적극 수술을 권하기에는 회복 과정과 결과를 고려할 때 충분히 만족하기 어렵고, 아무런 처치를 하지 않을 수도 없으니 수부 전문의를 만나보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그전에는 있어도 중요성이 그리 큰 줄도 몰랐고 평소 눈길도 잘 보내지 않았던 새끼손가락 마지막 마디인데 힘줄이 끊어지면 동네 병원에서 처치할 수 있는 수준의 질병이 아니란 말인가.
하는 수 없이 선생님이 써 준 진단서를 들고 인근 대학병원 정형외과에서 바로 진료를 받았다. 수부 전문의 선생님의 소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겉으로 봤을 때 힘줄이 끊어진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는지 별도의 검사는 시행하지 않았다. 힘줄은 뼈에 금이 가는 것과는 달라서 아무런 처치를 하지 않고 지금 그대로 두면 구부러진 상태 그대로 굳어 버린다고 했다. 외과적 수술을 하면 전신마취에 준하는 정도로 준비하여 시행하고, 수술 후 약 2달 정도의 회복기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수술을 위해서는 1주일 정도의 입원이 필요하다는 설명도 있었다. 수술 후 중간 마디가 구부저질 수 있도록 간단한 재활도 필수라는 말과 함께. 수술 없이 치료를 하자면 보조기구를 착용하고 9주 이상 시간이 필요한데, 그 기간 동안 한 번도 다시 구부러지면 안 되기 때문에 관리가 무척 까다롭다고 했다.
수술하면 2달, 수술하지 않으면 9주 이상 3개월 일정이라..
수술을 택한다면 엄마의 다음 항암 일정을 고려해서 휴식 주에 맞추려면 2주 뒤에야 입원이라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조금 생각해 보기로 하고 사이즈에 맞는 보조기구를 맞추고 병원을 나섰다. 수술이냐 비수술이냐 하는 의사 결정을 위해서는 회복 기간의 차이도 있었지만 수술을 위해서는 당장 일주일 입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나로서는 더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이 상태가 비수술로 회복이 가능한지 수술이 더 안전한 지에 대해서. 간병을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그래야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나중에 후회나 미련이 덜 남을 것 같았다. 의사 남편을 둔 선배 언니에게도 오랜만에 전화를 하고, 인터넷을 찾고, 친구 몇 명과도 넋두리 같은 통화를 했다.
검색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말렛 핑거(mallet finger, 일명 망치수지)로 수술을 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운동을 하다가 다치거나, 산업재해로도 발생하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뼈가 부러지면서 힘줄이 함께 끊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순수하게 힘줄만 끊어진 것이라 수술을 하는 것도 쉽지 않고, 수술 후 결과에 대한 만족도가 높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당시 상황에 대해 자문을 구했던 사람들 중에는 수술을 권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결국 비수술을 택하였다. 수부 전문병원에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는 치료법을 보고 온라인 상점에서 몇 가지 재료를 구매했다.
그렇게 힘줄 회복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새끼손가락이기는 해도 부목을 감고 있어서 당장 세수하는 것부터 불편했다. 음식 준비, 설거지, 집안일할 때 1회용 비닐장갑을 끼고 있어야 했고, 노트북 키보드를 사용할 때도 새끼손가락은 쉬는 대신 약지가 바빠졌다. 의외로 물건을 들거나 행주를 짤 때도 전보다 힘이 약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동안 몰랐던 새끼손가락의 존재감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신체 부위 중에 어느 곳도 필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것. 역할의 경중은 다를 수 있으나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정해져 있다는 것. 달리 그 역할을 다른 것이 대신한다 해도 많은 노력이, 적응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 사소한 것 같지만 사소하지 않은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있었다.
때 맞춰 부목을 새로 갈고 손가락을 관리하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익숙해졌다. 힘줄은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재생이라고 할 수 없고, 끊어진 주변 조직이 달라붙으면서 회복이 될 거라고 했다. 말씀대로 조금씩 손가락 마디가 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9주를 계획했지만 10주 이후부터는 부목을 풀고 지내는 시간을 조금씩 늘려가다가 넉넉하게 12주 정도 되는 때에 완전히 제거했다. 꽤 지루하고 긴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온전하게 회복했다. 너무 오래 부목을 하고 있었던 탓인지 반대로 이제는 주먹을 쥐면 마지막 마디가 완전히 접히지 않는다. 그래도 기능 상에는 전혀 지장이 없고 외관상으로도 수술 흔적 없이 말끔하게 나았으니 비수술을 택한 차선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최선의 선택이 되었다.
망치수지로 고생하던 중에 치아에 문제가 생겨서 약 3주에 걸쳐서 치과 치료도 받았다. 어금니가 아파서 신경치료를 하고 이 전체를 씌우는 치료와 몇 군데 충치 치료를 받는 바람에 얼마간 식사하기가 힘들었다. 전체를 씌우고 본래 모양에 맞게 성형하기 전 이틀 동안 입안이 온통 헐어서 일주일 가량은 거의 씹지를 못했다. 안 하던 집안일을 갑자기 많이 해서 그런지 손가락 관절이 아파서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손가락 마디가 아프기도 했다. 관절염이나 류머티즘은 아닐지 혼자 걱정하기도 했었다. 비타민 D가 너무 부족하다고 주사를 맞고 몇 주간 파라핀 치료와 처방한 약을 먹고 나니 다행히 조금씩 나아졌다.
하나 더. 그즈음에 원래 앓고 있는 면역성 질환으로 다형홍반도 다시 생겼는데 면역력이 떨어질 때면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양손가락 마디마디에 가려움을 동반한 빨간 반점이 생기는데 겉으로는 대상포진과 비슷하다. 수포는 크게 없지만 가려움증이 심하고 커질 만큼 커져야 가라앉는 것이라서 완전히 가라앉기까지 3주 정도 고생을 했다. 하필 그 세 가지 질환이 비슷한 시기에 겹쳐서 정형외과-치과-피부과를 번갈아 다녀야 했다. 그야말로 고난의 가을이었다.
엄마의 간병은 하지 않던 일을 한다는 것 때문에 그 자체로도 낯설고 힘들었다. 그 와중에 내 심신이 지쳐서 그런지 여기저기 탈이 난 것은 더더욱 그 상황을 힘들게 했다. 지나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자니,
'그동안 내가 참 고생했구나...' 싶다.
정작 힘든 일이 눈앞에 닥치면 그 일을 처리하느라고 코 앞에 것은 보지만 내 안을 잘 살피지 못한다. 하지만 하루 이틀 만에 끝나는 일이 아닌 이상 내 안을 잘 살피고 관리하는 것이 우선인 것 같다. 장기전일수록 더 그렇다. '간병하는 사람이 잘 먹어야 한다', '간병할수록 더 잘 쉬고 더 챙겨야 한다.'는 말이 빈 말이 아니다.
환자가 아픈데, 환자가 저렇게 힘들어하는데 생각하면 옆에서 잘 먹고 잘 쉬는 것이 쉽지 않다. '이렇게 잘 자도 되나, 이렇게 잘 먹어도 되나.' 싶게 죄책감이 느껴지거나 간혹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런 죄책감과 뻔뻔함을 느끼기 싫어 쉬어도 될 때, 더 먹어도 될 때 그렇게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죄책감이나 뻔뻔함은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낸 것이다. 내가 엄마에게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염치없는 것을 한 것이 아니다. 간병인의 몸이, 마음이 건강한 것으로 족하다. 나에게 에너지가 있어야 다른 사람과 나누고 다른 사람을 돌볼 수 있다. 내 안에 사랑이 흘러넘쳐 주위를 사랑으로 적실 수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