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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의 나무 Feb 13. 2024

암환자의 식탁, 물김치와 식혜

항암 치료 중 필수템이었던 메뉴 둘

‘넘어 가질 않네. 입 안이 헐어서 뭐가 받지를 않는다.’      


산해진미도 아니고 기껏해야 쌀밥이나 흰 죽 몇 숟가락인데도 식사 때마다 영 힘들어하셨다. 매운 음식도 아니고 간이 조금만 세도 자극이 되는 것 같았다. 엄마는 수술을 받으시면서 장기 여섯 곳 중에서 전부 또는 일부를 잃으셨다. 의사 말로는 지금까지 사용했던 길과는 전혀 새로운 길이 만들어졌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췌장은 여러 장기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을 뿐 아니라 위치도 깊숙한 곳에 있어서 수술이 까다로운 곳이다. 수술을 할 수 있는 상태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마음을 쓸어내리기가 무섭게 수술에서 여러 장기가 해를 입게 되어 이후 관리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수술 후 서울대병원에서 퇴원조치를 하고, 2주 남짓 동네 2차 병원에 잠시 모셨다. 수술 부위 관리나 식사라도 집보다는 병원이 안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병원에서 제공되는 식사(그래봐야 흰 죽)조차 못하겠다고 하셨다. 식기에 배어 있는 음식 냄새가 비위를 자극해서였다. 평소에도 생선류는 즐겨 드시지 않았지만 희미하게 남아 있는 비린내가 좀처럼 음식을 넘기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 될 줄이야... 


처음에는 유명 브랜드 죽 전문점에서 잣죽을 사다 드렸다. 하지만 한두 숟가락 드시는 것이 고작이었다. 평소에는 구수하기만 한 잣 특유의 냄새가 편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다음에는 흰쌀 죽을 사다 드렸더니 잣죽보다는 몇 술 더 뜨셨지만 서너 숟가락이 전부였다. 한 끼에 워낙 극소량을 드시는 데다가 흰쌀 죽을 드시고 싶다 하셔서 매일 조금씩 집에서 죽을 끓여 보온통에 담아 날랐다.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고 충분히 불려서 익힌 죽은 끓이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 드시는 것도 편안해하셔서 이후 병원에서는 내내 흰 죽을 드셨다. 


그럭저럭 밥은 죽으로 대체했는데 이번엔 찬이 마땅치 않았다. 수술하며 소화기관 곳곳을 자르고 이어 붙이고 했으니 자극적인 음식은 드시지도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무언가를 드시면 열감이 느껴지고 속이 울렁거려서 좀처럼 당기는 것이 없다셨다. 처음에 죽 전문점에서 반찬으로 포장해 준 작은 물김치 국물로 서너 끼니를 드셨다. 죽 전문점에서 사다 드리는 죽도 못 드시겠다고 하신 날, 엄마는 나에게 무를 사서 나박나박 썰어 넣은 물김치가 드시고 싶다고 하셨다. 엄마에게는 물김치를 담그는 일은 하나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나에겐 죽 전문점에서 물김치만 따로 사다 드리는 일이 훨씬 쉬운 일이었다. 그래도 한 번쯤 정성을 들여보겠다는 마음으로 무작정 마트에 들렀다. 무를 사러 갔지만 정작 손에 들고 나온 것은 포장된 얇은 쌈 무였다. 쌈 무 속에도 국물이 조금 들어 있으니 내가 뭔가 담그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싶었다. 그러나 기대가 무색하게 엄마는 쌈무는 전혀 드시지 않았고, 고춧가루도 넣지 않고 집에서 만들어 간 무생채도 한두 젓가락만 드시는 둥 마는 둥 하셨다. 이후로는 죽 전문점에서 이틀에 한 번 죽을 사서 아버지와 내가 먹고, 반찬은 엄마에게 드리는 식으로 해결했다. 


그렇게 2주 남짓 입원했던 병원에서 퇴원하고 집으로 모신 날,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았다. 종종 엄마와 아침 운동을 함께 다니시던 동네 친구분이 물김치를 김장 김치통 하나 가득 담가 오신 것이다. 나박나박 썰어 넣은 무와 당근, 사과와 배, 빨강, 노랑, 주황 색깔도 고운 파프리카, 밤까지... 보기만 해도 다채로운 맛이 느껴지는 조합이었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동안 친구분이 안부 전화를 하셨는데, 식사도 제대로 못하신다는 말씀을 들으시고는 무척 안타까워하셨단다. 제일 먹고 싶은 것을 물으셨는데 엄마는 주저 없이 물김치라고 하셨단다. 값비싼 것도, 귀한 것도 아니고 담백한 물김치가 제일 드시고 싶으셨다니...... 그 말씀이 귀에 맴돌아 꼭 만들어 주고 싶었다시며 퇴원하시는 날 맞춰서 담가 오신 것이다.


 알록달록 보는 것으로도 침이 넘어가는 물김치는 엄마 입맛에 꼭 맞았다. 달콤한 과일을 썰어 넣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갈아서 면포에 거른 국물로 만들어서 설탕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달콤하고 감칠맛이 났다. 이후 매 끼니마다 엄마의 메뉴에는 물김치가 빠지지 않았다. 값비싼 소고기도 한두 점이 고작이고 영양가 높다는 전복도 마다 하셨지만 이웃사촌이 담가 주신 물김치 덕분에 잃었던 입맛을 되찾으셨다. 그분은 이후로도 물김치를 두 번이나 더 장만해 주셨고, 김치도 담가 나눠 주셨다. 


수술 이후 항암 치료를 받으시는 동안은 구토를 많이 하셨는데 그런 중에도 조금이나마 식사를 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물김치 덕분이었다. 수술과 항암치료로 약할 대로 약해져 있을 엄마의 속을 달콤하게 시원하게 달래주었던 것은 단순한 물김치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그분의 사랑과 응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나 더. 항암치료가 시작된 이후로는 주사를 맞고 오신 후 3일간은 매일 식혜를 찾으셨다. 평소 명절 때면 손수 장만하셨던 음식 중에 하나인데, 명절이 지나면 딱히 즐겨 드시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항암 주사로 심한 구토와 장기가 약해진 상태여서 그런지 식혜를 드시는 진정 효과가 있는 듯했다. 그전에는 마트에서 파는 제품은 거들떠도 안 보셨지만, 항암 치료 기간 동안엔 대량으로 구매해 둔 품목 중 하나였다. 캔 특유의 냄새를 덜 느끼시도록 컵에 따라 드렸는데, 잘 드셨다. 흰 죽은 난이도가 낮았지만, 식혜는 초보 간병인에게는 난이도가 높아 엄두가 안 났는데, 다행이었다. 


이후에 정신종양학에 관한 공부를 하면서 알았다. 암환자들 특히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들의 경우 주사제가 위장 내 세포들을 자극해서 음식물이 들어가면 제대로 기능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항암주사라는 것이 암세포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세포조차 생존하기 어렵게 하다 보니 위장이 자극되고 구토를 유발하기 쉽다. 그래서였는지 엄마에게 물김치와 식혜는 약한 위장을 달래주는 반찬으로, 메스꺼움을 가라앉혀 주는 일종의 보호막으로서 제 역할을 한 듯싶다. 


지금은 더 이상 엄마 친구 분이 물김치를 담가 주시지 않고, 캔식혜는 주문하지 않아도 된다. 물김치가 없어도 식사를 하시고, 식혜 대신 요거트를 챙겨 드시는 엄마를 볼 수 있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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