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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의 나무 Feb 27. 2024

암환자의 식탁, 살치살과 언양식 불고기

씹을 수 있을 때, 즐길 수 있을 때 맛있게 먹기

‘소고기가 몸에 좋으니 꼭 챙겨 드려.’


‘아픈 사람한테는 영양가 있는 걸 드시게 해야 하는데. 어차피 양도 많이 못 드시니 소고기 사서 조금이라도 드시게 하고.’ 


‘샘.. 코로나 백신 맞기 전엔 특히 몸보신을 해야 한 대요. 미리 소고기 챙겨 드리세요. 샘도 몸보신 좀 하고...’     


소고기가 몸에 좋은 것은 익히 알고 있다. 일반인에게는 물론이요, 건강을 회복하려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안 그래도 장시간 큰 수술로 기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지신 분이니 기운을 내는 데도 필요할 테고, 단백질이나 철분, 각종 영양소가 풍부하니 드셔야 할 이유가 차고 넘쳤다. 무엇보다 생선은 특유의 비린내 때문에 꺼리시지만 육류는 채소에 비해 즐기지 않으시는 것일 뿐 준비하면 잘 드시리라 생각했다. 어차피 드시는 양이 적으니 넉넉히 준비하지 않아도 한두 끼니 연이어 드실 정도는 가격 부담도 없었다. 


하지만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안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평소에 외식할 때야 구운 것이든 전골이든 샤부샤부든 찾아 먹기는 했지만 막상 재료를 사서 조리를 하려니 막막했다. 나 역시 평소 식사량이 많지 않고 엄마 표현대로라면 입이 짧은 편이라 입맛이 까다롭다면 까다로울 뿐. 조리해 본 경험도 많지 않고 더욱이 맛있게 만드는 일은 그야말로 도전이 필요한 과제였다. 


처음에는 한우 소고기를 사서 미역국을 끓였다. 미역은 불리기만 하면 되었고, 국간장은 엄마표 수제 간장이 있었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국거리로 포장된 소고기를 사서 참기름과 들기름에 볶다가 살짝 색깔이 바뀌면 불린 미역을 넣은 후 엄마표 수제 간장을 알맞게 넣고 숨이 살짝 죽을 때까지 볶았다. 들깨 가루를 두 숟가락 정도 넣어 미역을 코팅하고 나면 받아 두었던 쌀뜨물을 부어 푹 끓이면 되었다. 엄마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다른 어떤 반찬보다 준비하기 수월했고 기본양념이 엄마표라서 물의 양과 간장의 양만 잘 조절하면 실패할 확률이 극히 낮은 나름 치트키인 셈이다. 


다른 반찬에 비해 만들기도 쉽고 맛도 어느 정도 보장되지만 문제는 금방 질리는 것이었다. 보통 미역국을 끓이면 이틀을 먹곤 했는데 꼬박 여섯 끼를 미역국만 먹으면 아무래도 물리기 마련이다. 잘하지도 못하는 일을 수고로이 하고 있는 것을 아시니 엄마, 아버지 두 분 다 불평 없이 잘 드셨지만 내가 질려서 먹기 싫었다. 소고기가 들어간 음식이긴 하지만 미역국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쉽게 조리할 수 있으면서도 맛있게 드실 수 있는 소고기 요리법은 없을까? 


그렇게 찾은 것이 살치살 구이였다. 구이? 무슨 대단한 조리법도 아닌 그저 고기를 굽는 것이다.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생각하기엔 고기를 굽는 것도 요리라고 할 수 있나 할 정도의 난이도를 매기기도 귀찮은 수준일 것이다(사실이 그렇다). 하루 식사 세끼와 간식 두세 번을 준비하느라 앞치마를 매었다 풀다 하는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나로서는 엄청난 발견이었다. 


처음에는 등심이었다. 마침 동네에 마트가 새로 생겼는데, 채소와 과일뿐만 아니라 육류도 종류별로 번갈아 가며 자주 할인 판매를 했다.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신선 식품들의 상태는 아주 좋았다. 비록 한우는 아니었지만 빛깔도 좋고 할인 폭이 큰 미국산 소고기를 골랐다. 200g 정도 무게로 슬라이스 되어 포장된 등심 한 덩어리를 사서 구웠더니 세 식구가 한 끼를 먹고도 남았다. 잘 구워져 맛도 있고 조리하기도 쉬워서 만족했는데 두 가지 사실 때문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하나는 두 분이 소고기를 예상보다 잘 드시지 못하는 것이었다. 적당한 식감과 고소한 맛이 내 입에는 잘 맞아서 여러 번 집어 먹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잘 맞았던 탄력이 두 분께는 조금 질기게 느껴지신 것이다. 소고기는 너무 오래 익히면 질겨지기 때문에 나름은 먹기 좋은 정도라고 생각하고 구웠음에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엄마는 맛이 좋다는 말씀으로 기대에 부응해 주셨지만, 아버지는 도통 즐기지 못하셨다. 아무래도 틀니로 씹으시기에는 훨씬 더 부드러운 조리법이나 한우처럼 더 양질의 재료가 필요한 것 같았다.

 

다른 하나는 두 분이 드시는 양 자체가 너무 적었다는 것이다. 내가 준비했던 음식이 맛이 없어서 드시는 양이 적은 것은 아닌가 자책하며 그래도 ‘고기는 좀 드시겠지’ 하고 준비했었는데... 엄마는 잘라내어 작아진 위의 크기만큼 드시는 양이 줄었고, 아버지도 소화시키는 양이 점점 줄어들어 드실 수 있는 양 자체가 확연히 줄어든 것이다. 맛이나 재료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드실 수 있는 양 자체가 눈에 띄게 줄었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확인한 것이랄까. 엄마가 편찮으시기 전에는 식사 준비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어서 짐작도 못 했는데 맛 좋은 음식이라고 해도 드시는 양이 엄청나게 줄었음을 실감했다. 준비한 등심을 내가 거의 해치우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다음 식사에 엄마가 드실 정도의 분량이 조금 남았다. 


그러다가 눈에 띈 것이 살치살이었다. 살치살은 먹기 좋게 작은 크기로 잘려서 포장되어 있었다. 등심은 슬라이스로 포장된 한 조각이 그리 크지 않더라도 한 번에 구울 수밖에 없었는데 살치살은 조각이 훨씬 작아서 먹을 양만큼만 나누어 굽기 수월했다. 등심 한 조각도 세 식구가 한 번에 먹고 조금 남을 정도이다 보니 원하는 양만큼 구워 먹고 남은 것은 새로 구워 먹을 수 있게 포장된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맛도 등심보다 고소하고 훨씬 부드러웠다. 그동안 고기 굽는 연습이 되었던 것인지 기름기가 적당해서 그런지 덜 질기면서도 맛있게 드시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평소에 고기를 즐겨 먹는 편이 아니라서 등심, 안심, 양지머리 정도야 익숙했지만 살치살이 어느 부위인지도 몰랐다. 알고 보니 꽃등심을 얻기 위해 분리한 살코기 부위라서 등심 앞쪽에 있고 소 한 마리에서 4~5kg 정도 나오는 꽤 고급 부위였다. 등심보다 적은 양에도 값이 조금 더 비쌌던 이유였음을 뒤늦게 알았다. 작은 조각으로 포장하느라 손이 많이 가서 비싼 것이 아니었던 게다. 포장된 살치살은 한 번 드실 양만큼으로 분량을 나누어 그때그때 준비할 수 있었다. 금방 익혀서 바로 드시고 빈 접시를 설거지할 수 있어서 개운했다. 


또 하나는 언양식 불고기였다. 학교에 다녀오는 길에 버스 터미널 마트 장보기는 참새 방앗간 같은 코스가 되었다. 모처럼 여유 있는 시간이라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며 둘러보는 중에 와규로 만든 언양식 불고기가 눈에 들어왔다. 치아가 약해지신 이후로는 살치살조차 좀처럼 챙겨 드리기 쉽지 않은 때였다. 그런데 와규는 육질이 연해서 드시기 좋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와규는 호주산 소고기 브랜드 중 하나인 듯한데 프리미엄 브랜드라서 양질이면서 질기지 않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마침 큰 폭으로 할인을 받아 싼값에 구매할 수 있었다. 육질도 부드러운 데다가 곱게 다져서 준비된 재료이니 시도해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포장된 분량을 세 덩어리로 소분했다. 바로 다음 식사 준비를 위해서 1/3은 작은 용기에 덜어 놓고, 한 묶음은 냉장실에, 나머지 한 묶음은 냉동실에 넣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준비하며 바로 불고기를 볶았다. 곱게 다진 소고기라 자박한 국물 맛은 없겠으나 조리하는 동안 달달하고 구수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조리한 불고기를 반찬으로 올리면서 살짝 걱정도 있었다. 혹시라도 예상보다 질기다고 하실까 봐. 하지만 걱정은 기우였다. 엄마는 기대보다 훨씬 잘 드셨다. 식사 중에도 여러 번 맛도 좋고 연하다고 만족해하셨다. 


항암치료 이후 약해진 치아를 치료하기 시작한 후로는 종종 드시던 살치살 구이를 못 드셨는데, 오랜만에 소고기를 맛있게 드시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아버지도 입맛에 맞으셨는지 접시 바닥이 보일 만큼 남김없이 다 드셨다. 와규를 사서 요리해 보라고 말씀해 주었던 선생님의 추천이 꼭 맞았다. 혈액 검사 결과 빈혈 수치가 좋지 않았는데 맛있게 잡수시면서도 드시기 좋은 요리를 발견하니 꼭 맞는 약을 만난 것처럼 기뻤다. 


나이가 들수록 근육도 쉽게 소실되고 뼈도 약해지는데 그나마 가지고 계신 근육을 유지하고 튼튼하게 관리하려면 좋은 음식을 잘 챙겨 드시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나이가 젊을 때는 무슨 음식이든 가리지 않고 잘만 먹으면 당장 별문제가 생길 일은 없다. 고기든 채소든 먹는 것 자체에 어려움이 크지 않으니 골고루 때맞춰 잘만 섭취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많아질수록 꼭 필요한 영양소와 에너지원을 위해서는 양질의 음식을 특히 고기를 잘 챙겨 드시는 것이 필요하다. 평소에도 육류를 특히 소고기는 즐겨 드시지는 않았던 데다가 치아가 약해지니 무르거나 연한 식감이 아닌 재료는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필요한 영양소도 챙기면서 드시기 좋은 것을 발견했으니 다행이다. 맛 좋은 것도 즐길 수 있을 때 잘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살치살과 언양식 불고기를 식탁 위에 준비하는 동안 조금이라도 매 끼니 별로 좋은 단백질을 드실 수 있게 된 것 같아 좋았다. 그동안 엄마는 소고기를 드실 때도 싼 부위를 골라 오래 드실 요량으로 주로 국거리로만 장만해서 드셨던 것 같다. 수입 고기가 많아져서 대중적인 재료가 되었더라도 엄마 생각에는 소고기는 비싼 것, 귀한 것, 그에 비해 질기고 맛은 덜한 것으로 남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좋은 부위를 많이 드시지 않아 학습된 결과일 테지만. 이제라도 좋은 고기를 맛있게 드실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이제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부드럽게 구운 고기조차 씹기 어려워하실지도 모르는데. 그때는 이유식처럼 고기를 갈아서 익히는 조리법만이 가능할 테지... 


드실 수 있을 때, 즐길 수 있을 때, 맛있게 드시도록 해야겠다. 

엄마는 그럴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으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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