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식 변기와 기저귀를 사용하다 문득 떠오른 생각
서울대병원 응급실에서 복수를 빼고 배액관 시술까지 마친 뒤, 심야에 2차 병원으로 전원을 했다. 응급실을 거쳐 일반병동에서 입원한 지 2주 남짓. 24시간 간병모드에 돌입했다. 밤에는 좁은 보호자 침대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아버지 식사와 간단한 집안일을 처리하느라 동분서주했다.
응급시술 후 집 밖에서 지내는 건 엄마나 나나 마찬가지였지만, 그 와중에도 간병인을 고용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니하지 않았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위기 상황일수록 간병인 같은 전문인의 손을 빌리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지만, 최대한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고, 계속 조마조마한 상태가 이어지다 보니 간병인을 고용한다 하더라도 보호자가 오래 자리를 비울 수는 없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게다가 짧은 시간이지만, 일반병동에서 경험한 몇몇 간병인의 모습을 보면서어떤 간병인을 만나는지에 따라 너무 다른 돌봄이 제공되는 모습을 보다 보니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2차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명절 한가운데여서 하루이틀은 병원 인근에 사시는 친척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낮 시간에 서너 시간을 교대해 주셔서 집안일을 챙겼는데, 명절 연휴가 끝나고부터는 그마저도 어려웠다. 얼마나 간병이 이어질지 가늠하기 어렵기도 했지만, 간병인들은 가급적 장기간 돌봄을 요하는 환자를 선호하는 탓에 2주 이상이 아니면 간병인을 구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다행히 작년까지 도움을 받던 동네 요양보호센터에 문의를 하니 4일간은 오후 5시간 교대해 줄 분을 구할 수 있었다. 아버지 식사와 집안일 챙기는 것도 빠듯했지만, 지난여름에 건강검진을 받고 추가로 예약해 둔 검사 일정을 바꾸지 않고 받을 수 있었다. 6개월 전에 예약한 것을 얼마간 미룬다고 해도 언제 가능할지 예측하기 어려웠고, 간병하는 나마저 문제가 생기면 그야말로 사면초가라 도움을 활용하기로 했었다. 추가 검사를 한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찬바람을 쐬며 바삐 오간 탓인지 4년 만에 감기에 걸렸다. 엄마의 간병을 시작한 이후로 각별히 조심했기에 코로나도 한 번걸리지 않았는데, 감기라니... 아마 건조한 병실에 불편한 잠자리가 이어지다 보니 체력이 버티지 못했던 것 같다. 간병하는 동안 보호자의 건강 돌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렇게 내 몸도 점점 녹초가 되어 가고 있던 때, 마침 기다리던 호스피스에서 입원 안내 전화를 받았다. 집으로 퇴원 후에 호스피스에 가고 싶어 하는 엄마를 달래고 달래, 호스피스로 이송을 했다. 엄마가 처음 호스피스에 입원했을 때는 4인용 병상이 모두 비어 있었다. 그날은 목요일이었는데, 주말까지는 입원 계획이 없다고 해서 너른 병실을 1인실처럼 사용했었다. 호스피스 담당 사회복지사 선생이 주말까지는 1인실이나 마찬가지니 마음껏 누리라고 했는데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공교롭게도 호스피스에 입원하자마자 엄마는 열이 나기 시작하더니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직전 병원에서는 부종이 있어서 알부민과 혈액 수혈을 번갈아 하기는 했지만, 열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호스피스 입원 후 간단히 몇 가지 기초 검사를 실시한 후부터 조금씩 오르기 시작한 열은 38도를 넘어 내려오지 않으니 점점 감당하기 무섭고 힘들었다. 처음에는 나의 질문이나 반응에 답은 하지 않고 그냥 눈만 껌벅껌벅하는 것이 장난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화가 난 듯 보이기도 했지만, 알고 보니 답을 할 기운조차 없고 정신이 또렷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 엄마를 일으켜 세워 휠체어에 태우고 복도 반대편(이라고 해봐야 병실 앞에서 세 두 걸음 밖에 안 되는 폭이지만) 화장실에 다녀오는 일은 너무 힘들었다. 분명 일반 병원에서는 병실 내 화장실까지 휠체어 없이 걸어서 화장실을 가셨었는데, 호스피스 입원하자마자 스스로 움직이지를 못하시다니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배뇨의 욕구가 저절로 조절되는 것도 아니고, 불안해서인지 엄마는 깊이 잠들지 못하고 요의 때문에 자주 깨셨다. 처음에는 자리에 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실을 가고 싶어 하는 엄마를 직전에 입원했던 병원에서와 같이 수액걸이와 함께 걸어서 이동해 다녀오는 동안 정말 낙상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열 때문에 온몸이 늘어진 엄마를 혼자 부둥켜안고 침대에서 내리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다. 엄마는 고열로 의식이 또렷하지 않은 듯했고,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모습에 정말 울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상황을 파악한 의료진들은 엄마에게 이동용 변기를 설치해 주었다. 몸을 가누기 힘들 때는 화장실까지 모시고 가지 않아도 침상 옆에서 바로 볼 일을 볼 수 있게 침대 옆에 두고 갔다. 한 번 사용을 해 보니 멀리 화장실을모시고 가지 않아도 되어 제법 유용했다. 번거롭기는 하지만 낙상 위험도 적고 움직임이 힘든 엄마에게는 안성맞춤이다 싶었다.
그러나 다음 날 밤, 새벽에 화장실을 가고 싶어 하는 엄마에게 이동용 변기에 앉히는 일은 또 다른 벽이었다. 열이 오르니 몸이 처지고 평소처럼 몸을 부둥켜안고 '하나, 둘, 셋, 으쌰'를 아무리 외쳐도 함께 호흡을 맞출 수가 없었다. 몸은 점점 내려가고 아무리 치켜올려도 몸을 바로 세울 수조차 없었다. 오른쪽 가슴에 삽입된 케모포트를 건드리지 않고 안아 올리기는 너무 힘들었고, 오른쪽 허리에 꽂힌 배액관이 눌리지 않게 혼자서 이동용 변기에 앉히려 아무리 애를 써도 엄마는 무릎을꿇고 주저앉았다. 너무 놀라고 힘들었지만 부둥킨 팔을부여잡고 ‘엄마, 엄마’를 외치며 애써 몸을 끌어올렸다.한 손으로 엄마를 부둥켜안고 다른 한 손으로 어렵게 더듬어 간호사 호출벨을 눌렀다. 간호사는 바로 병실에와서 상황을 파악하고 함께 도와 엄마를 변기에 앉혔다. 정말 식은땀이 흘렀다.
일을 마무리하고 간호사는 다시 와서 엄마의 열을 체크하고는 곧 해열제를 투여했다. 그리고는 만일을 대비하여 기저귀를 채우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기저귀라면 서울대 응급실에서도 채우는데 고생하고, 결국 사용도 못해봤던 그것이 아니던가.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아프다는 엄마를 달래 가며 간호사와 함께 어렵게 기저귀를채웠다. 하지만 그때뿐. 엄마는 열이 오르내리는 그 혼돈 속에서도 기저귀에는 조금도 볼일을 볼 생각이 없으셨다. 그렇다고 침대에서 내려와 일을 보기엔 너무도 어려운 상태. 하는 수 없이 누워서 볼일을 볼 수 있는 대변기를 사용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쉬운 건 아니었다. 열 때문에 몸이 처져 있는, 허리에 배액관을 꽂아 힘든 엄마의 허리를 들어 올려 변기를 밀어 넣는 일이 혼자 힘으로는 벅찼다. 더구나 엉덩이에 살이 다 빠져 뼈 밖에 남지 없는 엄마는 플라스틱 변기의 작은 자극에도 고통스러워하셨다. 그래도 어찌하나. 기저귀보다는 해볼 만 하다시니 시도해 볼 수밖에. 그렇게 처음 소량의 소변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이동식 변기보다 잘만 하면 사용이 간편하고 누워서도 일을 처리할 수 있으니 이것만이라도 사용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다음번 시도했을 때는 20 여분 남짓 변기를 받치고 있었지만 헛수고였다., 잔뜩 힘이 든 자세로 벌을 서는 것 같이 힘이 들어가 나의 허리와 목과 등에서는 열이 날 정도였음에도결국 엄마는 변을 보지 못했다. 허벅지는 떨리고 엉덩이가 아프다고 하는데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니 엄마도 나도 울고 싶긴 마찬가지였다.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부축을 하고라도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었는데, 누워서조차 원하는 때에 변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기저귀든 대변기든 나는 얼마든지 준비가 되어 있는데, 정작 누워 있는 엄마는 이 급격한 변화에 적응할 준비가 조금도 되어 있지 않았다. 몸은 의도한 대로 가눌 수 없어도 엄마의 의식은 누워 있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이 수치심의 문제인지, 투병에 대한 강력한 의지의 표현인지, 혹은 두 가지 모두가 원인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열이 내린 이후에는 내내 이동식 변기를 이용하셨기 때문에 그때 그 상황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으니...
이동식 변기를 사용하는 일이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사용이 거듭될수록 익숙해졌다. 이제 누운 곳은 침대고, 일어나 바로 옆에 앉은 곳은 화장실이 되었다. 침대를 일으켜 앉아 접이식 식탁을 펼치면 그곳은 식탁이 되고, 식사 후엔 양치질을 하는 곳이었다. 긴 커튼을 항상 내리고 있었으니 모습은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냄새와 소리는 감출 수가 없었다. 식탁과 침대, 화장실이 분리되지 않은 그 공간이 처음에는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곧 그렇게라도 욕구를 해결할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되었다. 매일 배뇨량과 배변량을 적고 뒤처리를 하다 보면 냄새나 소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기록하는 수치에 따라 마음이 흐렸다 개었다 할 뿐.
아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신생아 시절, 엄마도 나의 기저귀를 갈아 주시면서 그러시지 않았을까 짐작해 보았다. 한밤 중에 자다 깨어 기저귀를 갈면서, 금방 갈아 준 기저귀를 또 버려 내더라도 냄새난다고 찡그리기보다 무탈한 것을 확인하며 반가워하지 않으셨을까?나는 비록 내 처음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때의 감사함을 이렇게라도 대신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훨씬 더 오랜 시간 내가 사람 노릇 할 때까지 보살펴 주신 것에 비하면 지금의 이 시간은 1/10에도 미치지 못하니, 이 시간이 그때의 절반이라도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랐었다.
오래전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그때는 신경정신과)에서 1년간 임상심리기초수련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여러 환자들을 만나면서, 그동안 내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배웠다. 정보에 기초해서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일을 스스로 해내지 못할 때, 어떤 상황이 펼쳐지는 지를 보았던 시간은 인간에 대해 더 큰 눈을 뜨게 해 준 경험이었다.
이번엔 먹고, 자고, 배설하고....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다. 먹고, 자는 것과 같이 언급되지만 배설은 차원이 다르다. 배변훈련은 인간이 직립보행 이후 유아기 때 배우는 첫 교육일뿐만 아니라, 적절한 때와 장소를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의식이 있는 상황일 때, 기본적인 것을 해결할 수 없는 데서 오는 고통은 육체적 고통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리라. 더욱이 배변의 경우 통제력과 연결되는 것이니 원하는 때 혼자 독립된 곳에서가 아닌 누군가의도움을 받는 상황은 통제력의 상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원할 때 정해진 곳에 배설할 수 있는 자유... 너무 당연해서 생각지도 못했던 그곳에서 인간으로서의 자존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