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으로 곰과 마주칠 상황에 진지하게 생각했던 시기는 인디애나대학교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할 때이다. 이때 나는 미국 동부에 있는 들귀뚜라미의 종분화와 성선택을 연구했다. 이 연구를 위해 나와 나의 유일한 도우미인 와이프는 매년 인디애나에서부터 플로리다 북쪽 지역에 있는 들귀뚜라미를 녹음하고 채집했다. 내가 연구하던 들귀뚜라미 종은 숲에서 서식한다. 그런데 이 곳은 미국 흑곰이 활동하고 있고, 이들이 관광객이나 주민들과 충돌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채집 중에 흑곰과 마주칠 경우에 대비하여 곰스프레이를 준비하고 다녔다. 밤에 이상한 눈빛이라도 번쩍이면 혹시 곰일까 걱정했지만, 거의 대부분 미국너구리의 눈빛이었다. 다행히 연구기간 내내 곰과 마주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오늘은 지리산에서 동면하는 곰을 포획하러 간다. 동면은 곰들이 추운 겨울을 나는 방법이다. 임신을 한 암컷 곰에게 동면은 또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다. 암컷은 이 기간 중 새끼를 출산하는데, 오늘 포획 목표인 곰(RF23)이 이 가능성이 높다. 곰은 주로 바위 밑이나 속이 빈 나무에서 겨울을 나는데 이런 곳을 동면굴이라 한다. 겨울 내내 국립공원종복원기술원 연구원들이 동면굴의 위치를 파악하였다. 연구원들이 가까이 접근하면 곰들은 동면굴을 버리고 도망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연구원들이 동면굴의 위치를 몇 번 확인했지만 이 곰은 계속 동면굴을 지키고 있다. 이것은 이 곰이 동면굴을 버리고 도망가기 어려운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새끼 곰이 있는 경우이다.
오전 9시가 가까이 오자 종복원기술원 주차장은 이미 20명의 연구원과, 각종 장비, 차량으로 붐볐다. 출발에 앞서 마지막으로 복장 및 장비를 점검하고 오늘 업무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드디어 출발! 차량에 올라 마음속으로 오늘 만나게 될 어미곰과 새끼 곰들을 그려보았다. 우리가 성삼재를 통과할 무렵 그야말로 여러 산들이 겹치고, 그 사이에 운무가 흐르는 첩첩산중을 보면서 지나갔다. 포장도로에서 벗어나 산길로 차가 들어섰다. 차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고, 보호난간도 없는 길 옆은 작은 낭떠러지인데 운전하는 연구원은 익숙한 길을 가는 것처럼 전혀 동요가 없었다.
우리는 각자의 배낭을 메고 등산을 시작했다. 평소에 등산을 정기적으로 해서 연구원들을 잘 따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위가 많고 햇빛이 잘 드는 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우리 보고 점심을 먹으라고 했다. 아직 오전 11시이지만 동면굴에 투입되면 식사할 시간이 없다.
점심을 마치고 조금 이동하자마자 갑자기 긴장이 흐르기 시작했다. 동면굴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각 연구원들은 투입에 앞서 장비와 복장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곰의 공격에 대비해 방탄복을 입고, 헬멧을 착용하였다. 일부는 무선장비를 점검해 보고, 일부는 방패도 들었다. 수의사들은 마취 화살과 마취총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마치 군사작전을 준비하듯 1조, 2조, 지원조로 나눠 각자의 임무를 다시 확인하였다. 1조는 동면굴과 같은 고도에서 접근하고, 2조는 곰이 도주할 가능성이 있는 능선 쪽에서 접근한다. 지원조는 후방에서 기다리면서 투입조가 요청하면 무거운 장비를 들고 뛰어가야 한다. 나는 지원조에 편성되었다.
지원조는 대부분의 시간을 기다리는데 소비했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지루하진 않았다. 무선추적 안테나를 동면굴 방향으로 놓고 곰에서 나오는 신호음을 들었다. 약 1초마다 일정하게 '삑삑'거리는 신호음을 이용하여 곰의 움직임을 모니터링할 수 있다. 투입조들이 동면굴에 접근하자 신호음의 소리가 작아졌다. 새끼를 안전하게 해놓기 위해 동면굴로 들어갔다고 추정한다.
삑삑 소리가 갑자기 커지자 다들 깜짝 놀랐다. 그러다가 다시 조용해졌다. 곰이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간간이 투입한 조에서 무선연락이 오고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호음은 희미하게 들리고, 갑자기 투입한 조에서 긴급한 연락이 왔다. 지원조가 올라와 달라는 요청이다. 우리는 바로 등산을 시작했다. 동면굴은 보통 칠부능선 위에 위치한다. 등산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데 가끔 돌이 굴러 떨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정도는 대수롭지 않은 듯 계속 올라갔다
대부분의 곤충이나 양서류, 파충류, 일부 포유류의 동물은 대사활동을 극도로 억제하고 체온을 거의 0도 가까이 낮춘다. 이것을 동면이라 하고, 이런 상태에서는 몸에 축적한 지방을 이용하여 겨울을 날 수 있다. 그런데 곰은 겨울을 날 때 체온을 32도 정도로 유지한다. 이 온도는 정상적인 체온보다는 낮지만 동면하는 다른 동물보다 훨씬 높은 온도이다. 그래서 곰들은 겨울잠을 잘 때 의식이 있고, 심지어 종종 활동하기도 한다. 날씨 좋으면 곰이 동면굴 밖으로 나와 배설도 하고, 물도 마신다. 날씨가 추워지면 입구 쪽의 낙엽을 끍어 보아 동면굴 안으로 가져간다. 그런 다음 낙엽을 이불 덮듯이 덮는다. 그래서 한겨울에 눈으로 온 산이 덮여 있어도 동면굴 입구 주변은 맨들맨들하다.
숨을 헐떡거리며 동면굴 근처에 도착하자 모두 자리를 지키며 대기하고 있다. 오늘 포획이 쉽지 않아 보인다. 동면굴의 입구가 넓고, 굴이 'ㄱ'자로 중간에 꺾여 있다. 어미곰과 새끼 곰은 굴 안쪽에서 꼼짝 않고 있는 것 같다. 내시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려고 하는데, 굴이 꺾여 있어 이것도 쉽지 않다. 무턱대고 들어가 곰을 마취시키기엔 곰에게도 사람에게도 너무 위험하다. 이때 종복원기술원 원장님이 나한테 굴 안의 소리를 녹음해 보자고 제안했다. 참고로 나는 소리를 이용한 의사소통을 연구하고 있다.
나는 준비해간 소형 녹음기와 마이크로폰을 건네주었다. 원장님은 이것을 기다란 봉에 잘 부착하여 동면굴 안으로 집어넣었다. 한참을 기다렸다. 그러나 굴 안에서는 특별한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는 것 같다. 녹음기를 다시 회수하자마자 나는 녹음된 소리를 들었다. 거의 대부분이 잡음이었는데 녹음 가운데쯤에 분명 새끼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어미는 동면굴 밖의 사람들이 상당히 거슬리는 듯 거친 숨을 들이쉬고, 새끼는 마치 보채는 듯 한 소리 같다. 근처에 있는 다른 연구원들도 새끼 소리임을 확인해 주었다. 지리산에 새 생명이 태어나서 건강하게 살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종복원기술원 연구원들은 무인카메라를 동면굴 앞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며칠 내에 다시 올라와 트랩을 이용하여 포획하기로 하왔다.
야생동물의 복원은 크게 두 가지 모델이 있다. 하나는 '분리' 모델로 훼손이 덜된 대규모 지역을 지정하여 야생동물이 그 안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한다. 이 모델은 인구밀도가 낮고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는 북미, 남미, 아프리카의 국가들에서 적용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공존' 모델로 대규모 서식지 변형을 통해 사람과 야생동물이 통합하여 살아간다. 이 모델은 인구밀도가 높은 유럽의 국가에 적용되고 있다. 이 모델을 적용하고 있는 가장 성공적인 동물이 다름 아닌 불곰이다. 불곰은 유럽, 북미, 아시아에 걸쳐 넓게 분포한다. 유럽에서 불곰은 18, 19C 이래 사냥과 서식지 파괴로 개체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불곰은 지금 유럽에서 가장 흔한 대형포식자이다. 우리나라의 반달가슴곰 복원 사업도 공존 모델의 대표적인 예이다. 오늘 반달가슴곰 어미와 새끼들을 직접 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곰과 사람이 공존하며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산하였다.
(무인카메라의 사진을 확인한 결과 이날 포획에 실패한 곰은 새끼 세 마리를 출산했다고 종복원기술원 원장님이 알려주셨다. 곰복원사업 이후 야생에서 3마리의 출산은 처음이다.)
방문일: 2016년 3월 16일
장소: 성삼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