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겨울이 가기 전에 학춤의 모태가 되는 두루미의 짝짓기춤을 꼭 보고 싶었다. 겨울철새인 두루미는 우리나라나 일본에서 겨울을 나고, 시베리아에서 번식을 한다. 번식지로 이동하기 전에 두루미 암수는 짝짓기춤을 춘다. 몇 년 전 두루미를 처음 보았지만, 짝짓기춤을 볼 수 없었던 점이 무척 아쉬웠다. 그래서 이번에는 시기도 맞추고, 지난 20 년간 두루미를 연구해온 김경원 박사님도 모시고 철원으로 갔다. 그러나 이 분은 두루미의 짝짓기춤을 보고 싶다는 나의 기대에 호응하지 않는다. 살짝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간다.
이 분은 우리를 제일 먼저 철원의 사요리에 있는 소이산 정상으로 인도했다. 이 산은 겨우 해발 362m이지만, 정상에 올라서자 산들이 요새처럼 사방을 둘러싼 철원평야가 한 눈에 들어왔다. 궁예가 하필 여기를 태봉국의 수도로 정했는지 이해가 갔다. 소이산 정상에서 민통선, DMZ, DMZ를 따라 초소와 오피도 선명하게 보인다. 북쪽으로 요새와 같은 높은 산들은 북한 땅이다. 백마고지, 김일성고지, 노동당사와 같이 한국전쟁의 흔적도 눈 앞에 있다.
이 날은 하늘이 맑고 추웠다. 우리는 논에서 먹이를 찾고 있는 두루미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철원에는 몸이 회색을 띤 재두루미와 하얀색의 흰두루미가 월동한다. 그런데 서너 마리씩의 무리도 있고, 수 십 마리의 무리도 있었다. 김 박사님은 수 십 마리의 재두루미 무리가 일본 가고시마현의 이즈미에서 와서 기착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이들은 철원에서 먹이로 체력도 보충하고, 구애도 하며 시베리아로 다시 이주할 때까지 시간을 보낸다.
이즈미 재두루미와는 달리 철원에서 월동하는 재두루미는 주로 가족단위로 생활한다. 재두루미 가족은 어미와 아비가 있고, 어린 새가 한 두 마리 있다. 재두루미 가족은 대부분 월동하는 동안 가족 소유의 논이 있다. 이것을 영역이라 한다. 많은 새들은 번식을 할 때 영역을 유지한다. 그런데 두루미는 심지어 월동할 때도 영역을 유지하려고 한다.
영역을 유지하려면 비용이 따른다. 다른 두루미가 침범하면 경고를 보내고, 심지어 위협과 싸움을 하기도 한다. 동물들이 영역을 유지하는 경우는 반드시 영역에서 얻는 이익이 유지하는 비용보다 클 때이다. 영역의 주인은 영역 내에 있는 모든 먹이를 독점할 수 있다. 두루미 가족은 끊임없이 동종의 다른 가족이 침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성공적인 영역방어는 두루미 가족이 무사히 월동하는데 큰 기여를 한다.
동물들은 비용이 증가하면 영역방어를 포기한다. 예를 들면 영역 안에 먹이가 드물다거나, 반대로 너무 풍부할 때이다. 일본 이즈미의 두루미는 후자에 해당한다. 이즈미에서는 두루미에게 인위적으로 먹이를 제공한다. 두루미는 영역방어 없이 충분한 먹이를 확보할 수 있다. 그러면 이즈미에서와 같이 수백 마리의 두루미가 한 장소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무리 생활은 두루미의 생태에 맞지 않다. 힘들더라도 스스로 먹이를 찾고, 영역을 유지하는 철원의 두루미가 본성대로 행동하고 있다.
새들은 먹이활동을 할 때 위협에 대처하려고 한다. 두루미에게는 도로가 있는 장소에서 멀찍이 떨어지고, 지형이나 식생을 이용하여 몸을 숨길 수 있는 장소이다. 그러면서 김 박사님은 앞의 논을 가리켰다. 백마고지 역에 가까운 논은 경지정리가 되어 직사각형이지만, 동쪽의 논은 논둑이 구불구불하다.
철원평야는 용암이 분출하여 북한의 원산까지 흘러갔기 때문에 구릉이 많다. 전통적인 논은 이런 구릉을 따라 형성되었기 때문에 계단식이고 논둑은 곡선이다. 두루미는 지형에 따라 다양한 먹이와 온도 조건을 갖춘 전통적인 논을 선호한다. 뿐만 아니라 두루미는 전통적인 논의 지형을 이용하여 피신할 수 있다.
소이산을 내려와 이동하면서 두루미를 탐조했다. 이즈미 재두루미는 사람과 자동차에 익숙해진 듯 우리가 다가가도 쉽게 도망가지 않았다. 철원의 재두루미는 거리를 두었어도 우리의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는 조용히 유리창을 내리고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두루미가 이륙하여 도망가기 시작했다. 김 박사님은 내가 카메라를 창 밖으로 내밀었기 때문에 도망갔다고 알려 줬다. 두루미는 차가 갑자기 정지하거나, 창에서 물체가 나올 때 도망갈 수 있다. 나의 조심성 없는 행동을 반성하며 놀랍도록 민감한 재두루미의 행동에 감탄했다.
민통선 내에서는 대부분 전통적인 논을 유지하고 있고, 차량의 통행도 드물었다. 그래서인지 경계심이 훨씬 뚜렷한 흰두루미도 많이 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다가갔다. 두루미가 머리를 들고 경계를 하면, 우리는 더욱 조심했다. 이때 한 놈이 머리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비행하여 도망가자는 신호이다. 우리는 이 신호를 보면 바로 이동하였다. 필요 없는 방해를 주기 싶지 않았다.
쌀쌀한 겨울바람이 마른 가지를 휘둘렀고, 개똥지빠귀의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논에는 두루미 가족이 아직도 고개를 논으로 처박고 먹이를 찾고 있었다. 김 박사님은 지금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오늘 날씨가 춥기 때문에 두루미가 짝짓기춤을 추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 줬다. 대신 이 아름다운 순간으로 만족하기 바란다고 하며 웃는다.
창문을 열어 놓아 꾀 쌀쌀했지만 자동차 소음이 전혀 없어 작은 소리도 잘 들렸다. 얼마 후 부모 중 한 마리가 ‘끄럭~’하며 경계음을 냈다. 아마 계속된 우리의 존재에 불편을 느낀 모양이다. 김 박사님은 우리가 이 자리를 떠날 때라면서 바로 이동하였다.
오늘 두루미의 짝짓기춤을 볼 수 없었지만, 기대 이상의 탐조이었다. 두루미는 항상 우리를 감시하며 위험을 예측하려 하고, 우리는 두루미의 신호를 하나하나 읽으면서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다. 시베리아로의 이주를 준비하며 살을 찌우고 있는 두루미와 우리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방문일: 2016년 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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