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팽이 Jun 13. 2021

의심과 확신 사이

영화 <다우트>를 보며

창밖으로 바람이 분다. 밤새 바람이 얼마나 강했던지, 단단해 보이던 나뭇가지가 길에 내동댕이 쳐있다. 그 바람을 우린 그저 창밖을 지켜보며 상상할 뿐이다. 비가 와도, 눈이 내려도 방안에 있는 사람에겐 그건 단지 창밖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 <다우트>는 창가에 서서 모든 것을 바라보기만 했던 사람들을 창문 밖 세상, 혼돈의 한가운데로 이끌어내는 영화다. 바람을 맞고, 비를 맞고, 눈밭을 거닐면서 그동안 당연히 안다고 여겼던 모든 물체의 윤곽은 점점 희미해지고, 그 자리에는 답도 없는 질문만 무성해 진다.


영화는 1964년 성니콜라스 교구학교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제임스 수녀(에이미 애덤스)는 이 학교의 유일한 흑인학생 도널드를 특별하게 대하는 플린 신부(필립 시무어 호프만)의 행동에 의심을 품게 되고, 이것을 교장 알로이시스 수녀(메릴 스트립)에게 알린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평소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플린 신부의 행동에 확신을 갖고, 이 사실을 추궁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확실한 증거도 없이 자신을 몰아세우는 것을 그냥 두고만 볼 수 없는 플린 신부는 이에 맞서 싸운다. 

영화 <다우트> 스틸컷 

영화는 토니상을 받았던 동명의 연극을 영화로 각색한 만큼, 다분히 연극적인 설정이 가득하다. 인물들 간의 대립과 갈등은 수녀원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몇 안 되는 인물들 간의 대화 신을 통해 제시되고, 영화적 시간도 한 계절에 걸쳐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어딘지 분명히 알고, 그 목표를 향해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화법을 구사하며 관객들의 심장 한구석을 정확히 타격한다. 각본은 아주 작은 에피소드까지도 주제와 사건의 긴밀성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예민하게 연결되어있으며, 존 패트릭 셰인리 감독은 곁눈질 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집중한다.


금상첨화로 조-주연을 가릴 것 없이 훌륭한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있자면 정신이 버쩍 들 정도다. 이동진 평론가의 말대로 정말 연기귀신들의 전쟁터 한복판에 서서 넋이 나갈 지경이다. 매릴 스트립과 필립 시무어 호프만의 연기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에이미 애덤스나 약 10분 정도 등장하는 바이올라 데이비스의 연기 또한 이 연기 대가들의 기에 전혀 밀리지 않는 놀라운 포스를 보여준다. 매릴 스트립은 칼날처럼 매서운 알로이시스 수녀의 캐릭터에도 인간적인 실수와 연민을 정교하게 불어넣을 줄 알며, 필립 시무어 호프만은 지지도 비난도 할 수 없는 플린 신부의 묘한 캐릭터에 강함과 약함을 절묘하게 조합시키는 마술을 보여주었다. 현지 언론들에게서 ‘메릴 스트립에게 훔쳐낸 10분’ 이라는 찬사를 들었던 바이올라 데이비스 연기는 마치 거대한 얼음산맥의 작은 조각을 보듯, 드러내지 않고 꾹 꾹 눌러 담은 진심의 작은 응어리를 보고도 그 속에 무수한 아픔을 상상케 하는 놀라운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보수로 표상되는 알로이시스 수녀와 진보적인 플린 신부와의 대립이다.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가지고 도덕적 원칙을 지키려는 알로이시스 수녀와 원칙보다 사랑을 앞세우는 플린 신부, 그 관계 속에서 의심을 밝히려는 자와 그것을 덮어두려는 사람 간의 대립이 표면화 된다. 하지만 영화를 다보고 나서도 우린 도대체 누구의 손을 들어 주어야 할 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알로이시스 수녀가 증거도 없는 협박을 통해서라도 진실은 밝혀내는 것이 맞는 건지, 플린 신부가 진실을 말했는지, 혹 그렇지 않더라도 그것을 숨기는 것이 정당한 건지 모르겠다. 설사 그것이 진실이라고 해도, 그것을 들춰내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일까. 그렇게 끝없이 마음속에 수많은 의심이 생긴다.


그리고 이 모든 혼란을 실존적으로 관객들에게 대면케 하는 것은 밀러부인을 통해서다.

“수녀님은 꼭 받아들여야 할 것만 받아들이시겠지요. 그런 것들만 상대하면서... ”

밀러부인이 알로이시스 수녀에게 한 말이 똑같이 우리에게 비수가 되어 돌아온다.

그저 아이가 잘 되기를 바라는 엄마의 뭉툭한 진심이 모든 도덕적 판단과 논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진실과 거짓 사이에 있던 팽팽한 대립 사이를 뚫고,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곳에서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현실의 안일함에 균열을 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삶의 불가해함을 외면하고 그래도 평안함을 가장하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 불안정한 토대 자체를 인정하며, 내면에 일어나는 불합치와 끊임없이 싸우며 살아야 하는 걸까. 그것을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과도한 자의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어쩌면 그 모든 일이 다 지나간 후,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 내가 무슨 짓을 할지조차 나도 모르기에, 상대방을 도덕의 잣대로 재단하고 몰아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다 일말의 동정심이 속에서 꿈틀댈 수도 있겠지. 그리고 나와 똑같이 죄책감에 잠 못 이루는 사람의 손을 잡고, 그 순간은 누군가를 보듬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해답과 판단 뒤에 늘 뭔가 석연치 않는 그 불편함을 받아들이고,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의 영역을 남겨두는 것. 그렇게 마음 한편에 남겨둔 의심이 인간이 정직하게 직면할 수 있는 가장 정교한 윤리가 아닐까. ‘나’ 라는 완벽함에 함몰되지 않고 ‘우리’ 라는 세상과 더 민주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