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타자수로 궁에서 일하던 나의 엄마이야기
설에 친정집에 가서 엄마의 옛 사진을 딸과 함께 봤다.
오뚝한 코에 큰 눈으로 패셔너블한 옷을 입고 친구들과 전국을 여행하던 20대의 엄마는 지금 인스타그램을 하는 18살 손녀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내 기억 속에 늘 뽀글 머리에 촌스러운 옷만 입던 엄마는 사진 속에서 긴 머리에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모델처럼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빨간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친구들 사이에서 앳되고 말갛게 미소 짓고 있었다. 바닷가에서 수영복을 입고 친구들과 장난스럽게 웃는 엄마 모습은 낯설고 신기했고 참 예뻤다.
엄마는 문화재청에서 일하던 '타자수'였다고 한다(타자수라는 직업을 처음 알았는데, 엄마가 타자수였다는 사실도 그날 처음 알았다). 창경궁, 경복궁 등 서울에 있는 여러 궁을 돌며 일을 했다. 궁은 일이 별로 없는 데다가 근무하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 타자수였던 엄마는 매표소를 지키는 일, 은행에 돈 수납하는 일, 행사가 오면 손님 안내도 하는 일도 했던 것 같다.
여러 가지 일을 멀티로 했지만, 그래도 궁은 벚꽃 피는 계절 외에는 한가한 편이었다고 했다. 엄마 친구들도 공짜로 궁을 구경하러 자주 놀러 왔고, 비슷한 나이대의 소장님 딸도 사무실에 자주 놀러 와서 엄마와 한참 동안 수다 떨고 가곤 했다고 한다. 주말에도 근무해야 하는 공무원이었고, 감사 기간에는 정신없이 바쁜 타자수였지만, 매일 궁으로 출근을 하다니... 로망이 피어오르는 꿀 직업이었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타자수 자격 등록증 날짜를 보니 1974년이었다. 내가 태어나가 불과 5년 전, 엄마의 삶은 활짝 날개를 펴고 있었다.
청량초, 경희중, 덕성여고를 다녔던 엄마의 졸업앨범 사진도 들여다봤다. 원래 눈 꼬리가 올라간 엄마의 눈매가 시간이 흐를 수를 아래로 내려와 20대 중후반쯤에는 사진 속 누구보다 선량한 눈매로 변해있었다. 점점 나이가 들면 살아온 삶이 얼굴에 나타난다더니, 선하고 바른 엄마의 성격이 얼굴에 나타나고 있었다. 고되고 힘든 감사원 타자수 일도 기꺼이 지원해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던 엄마, 공짜 문화재 구경 하러 찾아오던 친구들도 늘 환영하던 사람 좋고 정이 많은 사람이 우리 엄마였다.
옛 사진으로 시작한 엄마의 이야기는 최근 엄마의 근황으로 옮겨왔다. 요즘 코로나로 노인복지관 선생님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집으로 찾아온다고 했다.
엄마는 그분들이 가져다준 인삼 싹을 정성껏 키웠고, 손녀가 5살 때 쓰던 24색 크레파스로 컬러링북을 곱게 색칠했다. 색깔이 많이 없어서 모네처럼 꽃잎에 여러 가지 색 그라디에이션 효과를 넣은 작품까지 있었다. 엄마가 알록달록한 색으로 오랫동안 색칠했을 여러 장의 컬러링북 그림들을 계속 보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계속 눈물이 났다.
엄마가 오랜 시간 홀로 지낸 시간이 그 그림 속에서 한 올 한 올 담겨 있었고, 한 여성이 힘겹게 가정을 지켜내려고 포기한 것들이 그 안에 모두 들어있었다. 그림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우리 엄마가 이렇게 색감을 잘 쓰는 사람이었구나, 이렇게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구나.'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리고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그렇게 반짝이던 사람이 너무 오랜 세월 고생만 하며 살았다. 이제야 몸이 붓고 허리가 휘는 고강도 노동에서 겨우 벗어났는데, 세월은 덧없이 흘러버렸다. 그제야 엄마가 한 시절을 다 바쳐 키웠던 내가 참 철없고 이기적으로 살아왔다는 생각에 미쳤다.
수납장 한 편에는 우리가 받은 소소한 상장들도 잘 보관돼 있었다. 엄마가 손녀에게 이런저런 상장을 보여주며, 이게 다 엄마가 받은 상장이라며 너희 엄마가 그때도 글을 참 잘 썼다며 자신의 일처럼 자랑을 했다.
이러 나도, 우리 엄마의 자랑이었다.
미생의 그 유명한 대사가 생각나, 괜히 또 눈물이 핑 돌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글짓기 상을 타던 내가 지금도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는 엄마, 지금도 시정소식지에 쓰지도 않는 글을 늘 찾아보는 엄마. 그렇게 엄마가 여전히 날 기대하고 바라보고 있는데, 도대체 난 나 자신을 얼마나 하잖게 대하며 시간을 허비하며 살아왔나... 세상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엄마의 자랑이다.
난 어릴 때 엄마처럼은 살기 싫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쩌면 지금 나도 엄마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이들이 하고 싶다는 것을 돈 생각 안 하고 어떻게든 해주고 싶은 마음을 30대 후반의 엄마는 삶과 투쟁하며 치열하게 쟁취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 마음은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엄마의 20대 시절처럼 내 딸들도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 소망이 늘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일 거다.
엄마가 자기 삶을 바치며 헌신했던 투쟁이 실패했는지 성공했는지 아직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지금 최소한 아이들과 즐겁게 관계를 맺으며 그 사랑을 다 돌려받으며 지내는 것,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고민하며 지낼 수 있는 것, 모두 유정애 라는 이름의 한 여성이 나란 아이를 위해서 희생하고 참아낸 삶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기는 할까.
돌아보니 난 한참이나 이기적인 아이였고, 아이를 15년 넘게 키운 지금에서야 그게 눈에 조금 보인다.
받은 사랑에만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바쁘다는 온갖 핑계로, 나에게 너무 큰 사랑과 보살핌을 준 사람을 자꾸 미루고 미루고 말았다. 시간이 더는 기다려 주지 않을 텐데...
손재주 좋은 엄마가 홀로 있던 시간 만들었던 매듭 인형을 가방에 달았다.
한때 왕궁을 당당하게 걷던 커리어우먼 엄마가 굽은 등으로 바닥에 앉아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며 홀로 보내던 시간을 기억해 내야겠다.
어릴 때 엄마와 나누지 못했던 추억들을 이제라도 쌓아갈 수 있는 시간이 남았겠지. 너무 늦지 않았겠지.
짧은 여행을 하고, 근사한 풍경을 바라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옛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래도 아직 남아있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사랑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 지금도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