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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츄리 Mar 18. 2022

가장 깊은 우물에서, 가장 넓은 세상을 보다

상경길은 성장길의 시작, 7호선 아이들과 나


2016년은


나를 굉장히 많이 변화시킨 해이다.

사실 그럴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더랬지




N수,


꽤나 많은 사람들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인생에서 제일가는 암흑기로 꼽기도 한다. 한 번으로도 힘든 수험생활을 N번을 더 한다니, 그럴 만도 하다.


반면에 그 시기를 내 생에 가장 빛나는 시절로 꼽고 싶은 사람도 있다.

그걸 보여주고 싶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1. 고등학교 졸업, 그리고 상경


"할래요, 재수"


2015년 겨울, 첫 수능을 치른 내가 부모님께 한 말이다.

그리 큰 고민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서울에 가야 했다.


내가 가고 싶은 거랑은 별개로, 언니 오빠가 서울에 있으니 막내인 나도 서울에 무사히 안착하여 합류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수능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다. 서울은 역시나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언니 오빠는 7~9년 전에 이미 한 번에 이뤄낸 서울 입성을, 막내는 두 번째에라도 성공해보고자 재수학원이라는 카드를 패기 있게 집어들었다.



3년 간의 여고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향했다.


졸업을 하고 미련없이 서울로 향하는 나를 발견했다.

안 갈 이유가 없었다.

이왕이면 서울 대감집 노비가 나으니까…도 아니라

경산에 더 있을 이유도 없고 더 있을 마음도 없었고

그냥 서울 가서 언니 오빠랑 같이 살면 되니까…


아무튼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지,

뉴스에 나오는대로 “사교육 금지”에 세뇌당한 채로 살던 내가 불과 한 달도 안 되어 “서울 사교육은 신세계 그자체”라며 우리나라 대학입시판에 그토록 물들게 될 줄은.



2. 앞으로 잘 부탁해 재수학원, 그리고 서울 친구들


혼자서 학원에 찾아갔다.


수능 성적표를 제출한 것 말고는, 등록할 때 뭘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며칠 뒤에 반배정 결과와 함께 2월 15일에 학원에 오면 된다는 안내가 문자메시지로 도착했다.


대망의 첫날,

거리까지 길게 늘어선 줄에 질색팔색하며 겁도 없이 10층까지 걸어올라가기를 택하는 바람에

2월 중순 한겨울의 날씨에 땀을 뻘뻘 흘렸던.. 강렬했던 그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학원의 첫인상은 나에게 ‘호기심’ 그 자체였다.

나는 그 날 “서울 애들”을 처음 봤다.

이렇게 말하니 무슨 서울 사람을 상상 속 동물 취급하는 것만 같지만, 적어도 "지방 애"에게 "서울 애들"이라는 말은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는 존재들을 뜻한다.

물론 주로 좋은 뜻이다.


그리고,

한데 모인 또래 아이들이 수능 준비라는 단 하나의 목표 말고는 다른 곳에 신경 쏟지 않는 모습도 처음 봤다.

그거 말고는 담임선생님도 있고, 조례와 종례도 있고, 몇 교시까지 수업을 한 후에 밤까지는 자습..

그냥 고등학교랑 마찬가지로 느껴졌다.


“엄마, 애들이 너무 착해.”


학원을 다닌 지 얼마되지 않아 느낀점을 가감없이 드러낸 말이었다. 혹여나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은 안 착했다는 의미로 전달될까 조심스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머리가 밝은 갈색으로 물들어 있어도, 서로 말 한 마디 섞을 기회조차 없는 재수학원 개강 초기여도,

그곳에서 만난 나의 새로운 "서울 친구들"은 사감선생의 눈을 피해, 남들에게 피해 가지 않게 서로를 챙겨주었다.

이를테면 자습 하다가 슬쩍 사탕 같은 걸 건네준다든가, 앞/옆사람이 졸고 있으면 톡톡 쳐서 깨워준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처음 사귄 "서울 친구들"과의 수험생활은 몇 달 간 이어졌다.


"이 바닥이 그래요"


영어 선생님이 언젠가 하신 말씀이다.

학생도 학생이지만, 대학입시 시장바닥은 강사 또한 '성적 안 좋으면 나가떨어지는' 곳이다.

잘되는 사람은 계속 잘되고, 아닌 사람은 계속 아니게 되는 그런... 그럴 수밖에 겠지만, 잔인한 곳이다.

그래도 내가 '아무렴 그래도 수험생보다야 힘들까' 싶은 철없는 학생은 아니었나보다.

그 선생님의 저 한 마디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걸 보니.


철저히 내신/수시 위주의 지방 사립 일반 고등학교에서

고인물들의 타성에 젖은 수업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재수학원 선생님들의 수업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십수년도 넘게 ' 바닥'에서 건재하게 살아남아 있는 분들의 모든 경험과 노하우가 녹아든 교재와 교수법을 접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 나는 사실 굉장히 감사하고  황홀했다.


앞서 언급한

'철저히 내신/수시 위주의 지방 사립 일반 고등학교에서 고인물들의 타성에 젖은 수업에 익숙해져 있던'

내가 서울에 올라와 재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접하지 못했을 기회이지 않은가?


그렇게 나는 가장 깊은 우물 속에서도 넓은 세상을 만나고 있었다.



7호선 팸


집이 가깝거나 방향이 비슷해 매일, 혹은 주말마다 등/하원을 함께 하는 단짝 친구들도 생겼다.

집에 같이 가는 그 시간만큼은 아무 걱정 없이 떠들고, 장난 치고, 온전히 즐겼던 것 같다.

특별히 대단한 놀이를 하지 않아도 그저 즐겁던 그 시간이 여전히 가끔 생각난다.



3.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았으니


힘들어야 성장하니까


힘들어야 성장한다,

성장하려면 힘들어야 한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시기에 가장 크게 깨달은 바 중 하나이다.

스무 살의 나는, 이게 진실이라는 것이 점점 확실해질 때마다 두려웠다.  사람은 한층  성숙해지고 성장하려면 힘든 시기를 거쳐야만 하는 걸까?

참으로 억울하기도 하고,,, 그런 감정이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죽을 만큼 힘든 때도 많았다.

매일 아침, 오늘 내가  해야 하는지, 오늘 하루를 어떻게 운용할지가 머릿속에 훤히 펼쳐질 때마다 말로 표현할  없는 뿌듯함과 희열감(?)까지도 솟으며  힘으로 살던 나였지만, 사람이니까 그날따라 피곤한 적도 있고, 아팠던 적도 있고, 참을  없이 졸린 적도 많았다.

공부하는 기계처럼 살긴 했지만 사실 역시나 기계는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 좋은 기억만 남겨두자


누군가에겐 인생에서 제일 힘들었을, 하지만 적어도 나에겐 정말로 행복했던 10개월의 대장정도 막을 내리고 재수종합반이 종강을 했다. 이젠 정말 수능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1년 전보단 나아진 성적에도 불구하고 목표대학에 가지 못해 씁쓸했지만, 그런 감정은 순간 뿐이었고 나에게는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리며 살아본 경험과 함께 소중한 인연들이 남아있었다.



4. 목표가 곧 종착지만은 아니었음을


당연히 대학에 가려고 재수를 했다.

새 친구 사귀려고도 아니고, 서울 생활에 적응하려고 재수를 한 것도 아니다.

결과로만 보면, 나는 가장 가고 싶었던 대학교엔 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나의 치열했던 2016년이 송두리째 희미해지지는 않았다. 이미 공부보다 중요한 것들을 많이 배우고 깨달은 시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수업비, 급식비, 특강비, 교재비 등 백만원도 훨씬 넘는 금액을 매달 일시불로 결제할 때면, 엄마 아빠 얼굴이 떠오르면서 '대학'이라는 단어가 또 한번 카드 영수증 위에 떠다니는 것 같기도 했지만 말이다. 껄껄


그때를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사람들의 심정도 백번 천번 이해한다. 하지만 그러면서 분명 우리는 성장했을 것이고, 지금의 우리를 만든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수다 떨 때 자주 등장했던 주제지만

길게 글로써 남겨보는 것은 처음인 나의 2016년 이야기이다.


다시 꺼내볼 그때까지,

안녕 나의 스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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