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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극P러 Aug 06. 2024

극 P로 살아남기 - 계획의 배신

Shut up and groove

  한때 '계획'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그 정도로 '계획'이라는 단어는 나한테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비교적 최근에 이르러서야,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계획과는 잘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뭐가 그렇게 안 맞는 거냐고 물어본다면, 일단 계획을 세우는 순간 하기 싫어진다. 누군가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개념으로(혹은 그 이상의 가치를 기대하고) 세우는 '계획'이 나한텐 '밑지는 장사'가 될 때가 많았다. 하기 싫어지는 이유는 첫 번째로, 계획을 세우는 순간 뭔가 갇히는 느낌이 든다. '해야 한다'라는 부담감에 내 미래의 시간을 저당 잡힌 느낌이다. 자유가 없어지는 느낌? 답답해지고 괜히 반항심이 든다.


  두 번째로는, 재미가 없다. '계획'을 세우는 순간부터 내 뇌는 이미 그 계획을 다 지켰을 때를 상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계획을 세우면서 이미 계획에 있는 할 일들을 느낌상으로는 1번 한 것이다. 그래서 계획대로 움직이면 이미 경험했던 일을 두 번째로 반복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지루하다. 정말 웃기게도, 계획대로 진행하면 생생하게 나의 '현재를 사는 느낌'이 아니라, 이미 예정된 형태에 갇혀버린 느낌이 든다.


  세 번째도 앞서 말한 두 가지 이유와 연결이 되는데, 재미가 없고 갇힌 느낌이 드니까 오히려 의욕이 저하된다. 조금의 부담이라도 느끼면 거부감을 심하게 느끼는 나로서는, 하고 싶었던 일도 계획을 세우면 오히려 '청개구리 심리'가 발동해서 하기가 싫어진다. 그러니 오히려 계획을 세우면 더 안 하게 된다. 꾸역꾸역 참고 해봤자, '원래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생각에 뿌듯함이나 성취감이 크지 않다. 또한 이것도 한두 번이지, 장기적으로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한테는, 계획을 100% 지켜도 간신히 본전이다. 그래서 내게 계획은 세울수록 '밑지는 장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계획과는 잘 안 맞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지만, 그동안 '계획의 중요성'에 대해 받아온 세뇌 때문에 오랜 시간 스스로를 힘들게 해왔었다. 어떠한 성취를 위해서는 '목표를 세우고, 그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것'. 이 개념이, 거부하는 마음과는 다르게, 머릿속에서는 정답처럼 새겨져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빠도 나한테 늘 '목표'와 '계획'의 중요성을 많이 말해왔었고, 그동안 받아온 교육에서도 '계획 세우기'가 유일한 정답이었던 것 같다. 당장 초등학교 방학 때만 떠올려봐도 '동그라미 계획표'를 그리고 지키라고 말했었고, 입시 과정에서도 '플래너 쓰기'는 더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깨닫게 된 계기는 동생의 조언 덕분이었다. 늘 '뭔가 해야 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것도 다 해야 해!'라는 강박으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그러나 부담만 느끼면서 행동은 하지 않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고, 동생은 "누나는 계획이랑 안 맞는 사람이야. 차라리 그냥 계획을 짜지 마. 어차피 안 할 거면 그냥 편하게 있기라도 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이 말이 나에게 너무나 숨통 트이는 말이었다!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아무도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부터 그동안 당했던 '계획의 배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물론 '계획' 자체가 나쁜 것은 절대 아니다. 계획은 유용한 도구이다. 그러나 그 도구를 적절히 활용하지 못하고 주객전도 되어버려 계획이 오히려 행동을 방해한다면, 계획과 잘 맞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계획은 그저 '관념'에 불과하다. 실체가 아닌 '관념'에 불과한 것에 왜 스스로 속박되어서 살아왔을까? 분명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 텐데. 돌이켜보니 나한테 더 잘 맞는 방법을 탐구하고, 그 방법으로 바꿀 생각을 하지 못 한 채 '난 왜 계획을 못 지키지'라고 자책하느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었다.


  그 이후부터 나는 계획 짜는 일을 서서히 줄였다. 급하거나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구체적인 계획을 짜는 일은 없어졌다. 극단적으로, 약사고시를 준비할 때 나는 계획을 짜지 않았다. 그때 지금까지 공부하면서 해본 적 없는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 짧은 시간 동안 방대한 양을 모두 숙지하고 암기해야 했기에, 내 현재 위치와 방향성을 파악하기 위해 '기록'은 필수였다. 그런데 나는 반대로 했다. 플래너에 '공부해야 할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공부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 방식은 나한테 정말 효과적이었다. 계획을 세우지 않고서도 그동안 했던 것을 점검하며 '나아갈 방향'을 알 수 있었으며, '공부한 것'을 기록하는 건 전혀 밑지는 느낌이 아니었다. 빨리 기록을 하고 싶어(플래너의 빈칸을 채우고 싶어) 오히려 의욕이 생겼다.


  '큰 그림은 가지고 있되, 구체적 계획은 세우지 않는다'가 지금의 행동 원칙이다. 그러나 아직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중이긴 하다. 예전보다 훨씬 나에게 맞는 방법이라는 건 알겠는데, 아직 완성형은 아니다. 앞으로 하나, 하나 다양하게 시행하고 시도해 보면서 나에게 맞는 길을 정립해보고자 한다.


  확신의 J 유형인 사람들은 이 글에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계획을 세우고 계획대로 이행하려고 하면 지루함을 느끼는데, 누군가는 머릿속으로 계획했던 것을 그대로 실제에서 구현해 내는 것에 만족감을 느낀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P 유형은 정해진 길을 가는 것보단, '탐험가' 방식이 더 잘 어울리는 유형이다. 탐험가는 a step(step1) -> b step(step2) -> c step(step3) 으로 갈 길을 정해 두는 것이 아니라, a step을 일단 경험 후에 step b, stepb' 또는 stepb''를 구상 후 그중 하나로 가거나, 아니면 c step를 먼저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처음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e step을 몸소 탐험하며 갈 때 희열을 느낀다. 그래서 더, 다양한 방식의 탐험이 중요하며, 나와 딱 맞는 방식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더더욱 이런 탐험이 필요하다.


  유튜브 채널 『길 인간학연구소 』의 「J와 P의 차이(심화편)」라는 영상을 보면, 극 J는 놀 때도 일하는 것처럼 놀고, 극 P는 일할 때도 노는 것처럼 일하는 편이라는 말이 나온다. (결론적으로는 나이 들 수록 J와 P의 균형을 맞춰야 좋다는 말이 나오는데ㅠ 난 아직 자신 없어) 내가 지금 지향하는 바가 이것이다. 일하는 것도 최대한 노는 것처럼 즐겁게 할 수 있는 것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계획의 구속을 덜어내고 그러면서도 계획이라는 도구를 나한테 최대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그 정도를 찾기 위해 계속해서 탐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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