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화요일에 피아노학원 첫 레슨을 받았다. 내가 고른 곡은 베토벤 '비창 소나타 3악장'이다. 내가 사랑하는 베토벤의 소나타 중에서 1. 꽤 유명하고, 2. 그나마 도전해 볼 수 있을 만한(2악장은 느려서 내 기준 재미가 덜하고.. 1악장은 나에겐 어렵다 ㅠ) 3. 그리고 내가 너무 좋아해서 계속 들어도 질리지 않을 곡으로 고른 것이다. 또 나에게 너무 쉽지만은 않은, 도전적인(challenging) 곡이라서 계속해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첫 주이기 때문에 더 긴장감을 가지고 거의 매일 연습을 했고, 계산해 보니 5일 동안(하루 빠짐) 대략 7시간 반 정도를 연습했다. 아무리 좋아하는 곡이더라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마음대로 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부분을 잘하기 위한 연습'을 하는 건 조금 지루하긴 한데, 12월에 있는 학원 연주회에서 연주를 해내리라는 일념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렇다. 내 목표는 '곡에 대해 배우기' 보다도 "무대 경험"이다. 내 안에는 늘 '나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또 음악과 악기 연주를 사랑하는 나라서, 무대 경험에 목말라 있는 것이다. 학원에서 여름, 겨울 2회 정기적으로 여는 연주회는 내 눈빛을 반짝이게 만들었다. 이 기분 좋은 긴장감과 설렘,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게는 '무대공포증'이 있다. 차라리 말로 하는 프레젠테이션 발표는 괜찮다. 그런데 정교한 작업이 필요한, 그리고 '실수하면 안 된다'라는 걱정이 강하게 드는 악기연주에 대해서는 무대공포증이 심하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 무대공포증 경험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약대 재학 시절, 오케스트라 동아리에서 활동을 했었다. 방학 때도 모여서 긴 시간 동안 합주 연습을 하느라 힘들긴 했지만, 음악을 너무나 사랑하는 나는 긴 연습 탓에 목과 어깨가 너무 아파 진통제를 먹으면서도 행복함과 전율을 느끼면서 연습을 했었다.
3학년 겨울방학 때, 드디어 고대하던 첫 무대에 올랐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손이 떨리기 시작하는 거다. '이게 바로 무대공포증이구나' 싶었다. 내가 의식 상에서 '아, 너무 떨린다. 어떡해' 이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아니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무대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몸이 먼저 반응을 하는 거다. 결국 나는 연습했던 때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어떻게든 정신을 부여잡으며 가까스로 무대를 마쳤다. 심지어 내가 솔리스트도 아니었고, 그저 오케스트라 단원 중 한 명이었는데도 그랬다. 무대의 조명을 제외한 관중석의 불이 꺼지는 순간부터, 내 손에선 땀이 났고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뭐가 문제였을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먼저 반응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그때부터 이유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무대공포증을 느끼는 이유의 근원이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해 봤는데,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멋있어 보이고 싶어서'였다.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 나는 이과 동시에 '남들 앞에서 멋있게 연주를 해내는 내 모습'을 간절히 원했다. 연주를 하면서 그것에 대해 생생하게, 자주 상상도 하곤 했었다. '이렇게 연주하는 나, 얼마나 멋있게 보일까?' 이런 생각, 솔직히 자주 했었다.
그게 문제였다. 무대 위에선 연주에 '완전히 몰입'해도 실수가 나올 수 있는데, 정신이 아예 다른 곳에 가 있었으니 오죽했을까. 그런 마음이 고스란히 무대 위에서 반영되어 드러나 버린 것이다. 근데 한편으로는 이게 악기 연주의 또 다른 매력이 아닌가 싶다. 내 내면을 연주라는 매체로 드러내는 것이니 말이다. 음악은 내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좋은 연주를 위해 마음을 다스리고, 가다듬게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을 깨닫기 전의 나는 방 안에서 혼자 피아노를 치는데도 머릿속에서 '군중 앞에서 연주를 하는 나'의 모습이 상상되면서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증상이 점점 더 심해져 나중에는 실제로 연주를 하지 않고 있는데도 '연주하는 상상'만으로도 손에 땀이 흥건해지기도 했다. 원래 다한증이 있었던 사람이 아닌데도 말이다. 동생에게 털어놓았고, 동생의 조언이 도움이 되었다. 동생은 '몰입'이 얼마나 즐거운 경지인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멋있다고 느끼는 연주자들 모두, 그 순간에 몰입해서 연주하기에 바쁘지, 그 누구도 '나 어떻게 보일까' 이런 고민하는 사람 없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래.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청중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줘야 할 것은, '연주에 완전히 몰입하는 나', 그리고 '그렇게 몰입해서 만들어진 음악'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걸 연습해야 되는 것이다. 포커싱 대상을 완전히 바꿔야 함을 알게 되었다. 이것도 연습이 필요하겠지. 첫 레슨을 앞두고 오랜만에 손에서 땀이 났다. 남 앞에서 연주하는 것이 나에겐 아직 너무 긴장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나를 자주 노출시키려고 피아노 학원에 등록한 것이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온전히 연주에만 몰입하는 연습. 이게 시작이었다.
12월에 있을 연주회에서, 마냥 쉽지 않은 곡에 지원하는 것. 나에겐 굉장한 도전이다. 예전처럼 그래도 묻어갈 수 있는(?) 오케스트라 단원 중 한 명으로서가 아니라, 조용한 가운데 오로지 시선이 나한테만 집중되는 독주자로서의 연주에 도전하는 것이니 말이다. 심지어 지금 양손 엄지 손가락에 수지방아쇠증후군을 앓고 있어 손이 내 마음대로 작동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고 있기도 하다(그래서 늘 원했던 피아노 학원 등록을 오랜 시간 미뤄왔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든 해내고 말 것이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이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한다. 타인과 구별되는 고유한 나를 만든다.
영화 <소울(2021)>을 보면, 주인공인 재즈피아니스트 '조'가 무대에서 연주에 완전히 몰입해 마치 공간에 존재하던 다른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피아노와 연주하는 자신, 그리고 그 음악만이 존재하는 듯한 경험을 하는 연출이 나온다. 진정한 몰입의 경지란 그런 것일까. 12월의 나도 그런 몰입을 보여줄 수 있는 연주자가 될 수 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