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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드 Nov 20. 2023

인생에 하필 '해외여행'이 필요한 이유

완전히 낯선 공간이 자아 발견에 끼치는 힘


최근 중학생 때부터 알고 지낸 소울메이트 친구와 처음으로 단 둘이 여행을 다녀왔다. 장소는 대만, 일정은 2박 3일로 다소 짧았다. 어디서 한 달 살기를 하거나 오지 체험을 한 것도 아니고, 지하철 역마다 한국어 표기가 되어 있는 나라에 고작 이틀 다녀와 놓고 쓰는 포스팅에 붙이기엔 다소 거창한 제목 같긴 하지만 나는 정말 이번에 살면서 왜 해외여행을 가야 하는지를 느꼈다. 참고로 YOLO를 예찬하려는 건 아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인구수만큼 개성과 독자성이 있다지만 사실 우리는 굉장히 정형화되어 있고 타인과 닮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학교나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들과 시공간을 공유하며 하는 일이 비슷한 사람들과는 내가 하는 행동마저 겹치곤 한다. 비슷한 얼굴, 완벽히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 정해진 동선. 잘 들여다보면 개인의 시공은 놀랍도록 정체되어 있다. 이런 환경에서 내가 모르는 나를 찾아내고 내가 달라질 수 있는 여지를 찾아내기란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변화의 이야기는 새로운 학교에 들어갔다든지, 유학이나 이민을 떠났다든지, 퇴사를 하거나 결혼/이혼/출산 등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대격변을 겪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쉽고 확실한 선택지가 바로 여행, 그것도 해외여행이다.






여행을 같이 갈 친구는 나보다 일도 많고 선약도 많았기에 숙소 정하기, 비행기표 예약하기, 일정 짜기 등 출국 전에 해야 할 큼직한 사항들은 모두 내가 맡게 되었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시간 여유가 있고 계획적인 쪽은 나였으니까. 나는 오래간만에 A4 용지를 접어 나뉜 칸마다 가볼 장소를 적고 구글 맵으로 이동 시에 걸리는 시간을 일일이 확인했다. 본격적으로 계획을 짜기 전에 서점에서 가이드북을 읽었으며 환전, 공항버스 사전 예매, 로밍 신청, 기타 여행지에서 사전 예약이 필요한 곳들을 위한 예약, 출국 직전 모바일 체크인까지 다 했다. 여기까지는 내가 아는 '나'였다. 


대만에 도착했을 때 뭘 먹을지 알아보는 건 친구 몫이었다. 나는 배고프면 어지간한 음식은 다 먹을 수 있는 반면 친구는 나보다 먹는 것에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구가 숙소 바로 앞에 유명한 도넛 집이 있다며 같이 먹자고 하고 테이크아웃 조건마저 까다로운 카페에 가자고 의견을 냈을 때 흔쾌히 따랐다. 타이베이 중앙역의 규모에 나란히 넋이 나가서 헤매긴 했지만 괜찮았다. 길을 못 찾고, 비행기 시간이 너무 일렀던 탓에 첫날은 모두가 상당히 피로할 것을 고려하여 (내 판단에는) 일정을 빡빡하게 짜지 않았다. 이런저런 사항을 고려하는 이성적인 '나'도 역시 내가 아는 나의 일부였다.


타이베이 101 전망대에서 보는 야경의 일부


그러다가 조금씩 뜻밖의 '나'가 나타났다. 중식을 별로 안 좋아하면서 딘타이펑의 샤오롱바오에 감격하는 나, 토란국은 절대 안 먹으면서 타로가 들어간 디저트 샤오롱바오는 맛있게 먹는 나(토란과 타로는 같다!), 타이베이 101에 있는 추의 원리를 설명하는 영상을 끝까지 보는 나(나는 전시회에 가서도 영상물은 거의 안 보는 타입이다). 여러 사항을 세심하게 확인한다고 노력했으나 구글이 나에게 틀린 정보를 알려주는 바람에 이상해진 2일 차에 나에 대한 화보다는 친구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훨씬 많이 느끼는 나(중요 정보: 단수이의 주요 관광지는 매월 첫째 주 월요일에 쉬는데 그 많은 월요일 중에서 우리는 하필 첫째 주 월요일에 단수이를 갔다... 구글 맵에서는 이를 알려주지 않았으며 쉬는 날에도 '영업 중'이라는 정보를 띄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월요일에 타이베이 101을 가는 건데, 출발 전날까지도 일기예보에서는 그날 비가 온다고 했다. 전망대를 가는데 비가 오면 보는 재미가 확 떨어지지 않는가?! 하여튼 구글 때문에 망한 2일 차... 흑흑), 가끔이지만 친구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는 나 등등. 또 나는 내 생각보다 고양이를 좋아했다. 커피를 마실 타이밍이 되어 친구가 고양이 7마리가 있다는 카페를 추천했는데, 그 순간 해외까지 와서 무슨 고양이 카페를 가냐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나는 말없이 친구의 뒷모습을 간간이 찍어주기도 했다. 인형이라면 모를까 사람 찍기에 관심이 없는 나인데.


내심 가장 놀랐던 건 숙소에 돌아와서 다 씻고 일기를 쓸 준비를 할 때 용산사에 가자는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면 밖에 나가지 않고 양치를 하면 눈앞에 치킨이 있어도 안 먹는 성격인데 말이다. 물론 처음엔 부드럽게 사양했지만 친구가 혼자 가기는 조금 무섭다는 말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잠옷용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나가서 감자튀김 대신 있다는 맥도널드의 고구마튀김을 얻어먹었다. 한국에서는 절대로 하지 않을 일이었다. 한편 우리는 내가 예상했던 장소들을 가지 못하기도 했다. 날씨가 상당히 더웠으며 길 찾기가 쉽지 않은 탓이었다. 사실상 계획이 꽤 틀어졌음에도 나는 괜찮았다.


서양 문화를 좋아하는 나는 테마파크 방문을 위해 갔던 일본이 아닌 다른 아시아 국가를 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 대만은 다시 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또한 내가 모르던 나였다. 






당연한 소리지만 내가 모르는 '나'는 관성과 익숙함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평소와 다르게 행동해야 할 까닭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거의 고정된 일상에서 갑작스러운 실패나 도전, 혹은 즐거움이 나타날 확률은 매우 낮다. 하다못해 외국인이라도 만나면 언어를 다르게 사용하면서 나의 새로운 기지 혹은 부족함을 엿볼 수 있겠지만(언어 사용은 개인의 사고 회로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럴 기회가 많은 사람은 드물다. 마치 가던 식당만 가는 것처럼 존재는 그렇게 영영 멈춰 있게 된다.


그런데 꼼짝없이 고정되어 있던 것 같던 나도 새로운 세상에 떨어지면 특이한 행동을 하게 된다. 소심했던 사람이 어떻게든 내 의사를 전달하려고 몸을 쓴다든가, 상상도 못 했던 요소와 타협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어디에 숨어 있는지도 몰랐던 당당함과 용기가 튀어나온다든가. 이런 발견과 함께 자아가 확장되면 그만큼 자신감도 생긴다. 나의 잠재력을 추상적으로 알고만 있는 것과 경험하는 것의 차이는 클 테니 말이다. 그러면서 나는 좀 더 나를 믿게 된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이 아직도 자본주의 중심으로 굴러가서 그런지, 나를 알아갈 수 있는 완전히 다른 시공과 환경조차 돈을 들여 사야만 하는 측면이 있다. 노동자에게 박한 나라에 사는 대가로 휴가도 짜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통장과 연차를 비틀어서 '나'를 얻어낼 수 있다면 훌륭한 거래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정체된 시공에 변화를 주는 데에 초능력이 필요하지 않은 게 어딘가. 


그래서 나는 다시 여행을 꿈꾼다.


마무리는 태북당대예술관의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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