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문 연습, 둘

프로그램대상 수상소감문. 프로그램명 '설상가상' [EBS 2019 기출]

by 이해섬

재미로 사주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들은 말이 ‘나서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였습니다. 그런데 프로그램이 점점 더 주목을 받더니, 설상가상 이렇게 상까지 받아 큰일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대표로 나오게 됐으니 어쩔 수 없네요.

저희 프로그램을 힘껏 즐겨주신 시청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꺼낸 이야기에 함께해주신 덕분에 저희도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프로그램 이름을 처음 지을 때는 마음에 썩 들진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이라니, 특색도 부족하고 너무 직설적이라 오히려 오해를 사기 쉽다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부장님 의견이라 마지못해 따른 것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가볍지 않은 소재에도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인간에 의해 파괴된 환경 위에 인간 사회가 다시 놓이는 것이 생태계 입장에서는 설상가상의 재해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욕심이 지구를 파괴한다고 곧잘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 역시 인간의 오만함이 낳은 착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지금 파괴하고 있는 건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찰나의 생태계일 겁니다. 저희가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라고 해서 지구가 파괴된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이미 심각하게 망가진 지금의 생태계에서 우리가 살아가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이런 화두가 효과적으로 던져졌는지, 끊임없이 문제가 생기는 자급자족 서바이벌로 치우치진 않았는지 돌이켜본다면 분명 아쉬움도 남습니다.

처음 PD로 입사하면서 했던 결심이 있습니다. 나부터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자, 유행을 쫓기에 급급해하지 말고 나만의 프로그램을 만들자, 두고두고 회자될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자. 그런데 어느 순간, 프로그램이 내 의도에 딱딱 맞아떨어지도록 고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이든 그건 나만의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든 이들 모두의 것이고, 프로그램을 즐기는 대중들의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니 제 의도와 어긋난 부분을 꼭 문제점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볼 줄도 알아야겠죠.


우주에조차 수명이 있을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마도 없겠죠. 주변을 돌아볼 줄 아는 겸손함이 이 유한함 안을 살아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사주에서 들은 말도 이와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 두고두고 회자될 프로그램보다는 지금 저희 곁의 대중이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PD가, 오만함을 내려놓은 생태계의 일원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말이 길어졌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슬슬 사주가 걱정되네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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