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문 연습, 셋

제시어, 'A' [2007 KBS 변형]

by 이해섬

무안하다. 멋쩍다. 자기네 발음에 대한 자존심 같은 걸까. 아니면 일종의 인종차별일까. 이런 생각이 들 만큼 내게는 아주 사소한 차이였다.


베를린에서 출발, 동유럽을 살며시 돌아 구불구불 서쪽으로 향한 유럽배낭여행의 마지막 경유지는 영국 런던이었다. 가장 먼저, 어릴 때부터 막연히 동경하던 빨간색 이층버스를 탔다. 킹스크로스역에서 9와 4분의 3 승강장도 찾았다. 타워브리지를 건너고 빅벤을 올려봤다. 횡단보도에서는 오른쪽부터 살피며 길을 건넜다. 버킹엄궁전을 구경하고 세인트제임스파크와 트라팔가 광장을 지나 영국박물관까지 걸었다. 우체국에 들러 한국으로 엽서도 보냈다. 그리고 도로에 블랙캡이 보일 때마다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마지막 목적지는 비틀즈 팬이라면 런던에서 빼먹기 힘든 그 길이었다. 나는 기차역의 관광안내소로 갔다. 그리고 잠시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창구의 직원에게 길을 물었다.

“애비로드(Abbey Road)에 어떻게 갈 수 있나요?”

까만 뿔테안경을 끼고 노란 수염을 옅게 기른 직원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어디요?”

“애비로드요.”

“네?”

“애-비-로-드-.”

하지만 직원은 도통 알아듣지 못했다. 난감하다는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나는 당황했다. 내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철자를 하나씩 말했다.

“A, B, B, E, Y. Abbey Road.”

“아.”

직원은 그제야 비죽 웃었다. “비로드.” 직원은 마치 내 발음을 바로잡아준다는 듯 A에 강한 악센트를 넣었다. 그리고 내 휴대폰을 건네받더니 구글맵을 켰다. 출발지와 목적지를 설정하자 금방 버스정류장 위치와 노선 번호가 안내됐다. 이렇게 간단했다니! 나는 인사를 하고 서둘러 역을 빠져나갔다.


버스에서 내린 곳은 좁은 도로를 낀 평범한 주택가였다. 곳곳에 ‘아비로드’라고 적힌 표지판이 걸려있었지만, 그건 관광용이 아닌 실생활용이었다. 별다를 것 없는 그 길을 쭉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앞쪽으로 사람들이 보였다. 곧 비틀즈가 녹음했을 스튜디오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횡단보도가 있었다. 사람들은 횡단보도 좌우에서 자동차가 뜸한 타이밍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회가 포착되면 얼른, 하지만 최대한 여유로운 동작으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들의 일행이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폴 매카트니를 따라 맨발로 길을 건너는 사람도 있었다. 다들 나름대로 이 좁은 도로를 즐기고 있었고, 자신의 모습을 이 길목과 포개어 사진에 담기 바빴다.




숙소로 돌아오면서 찍은 사진들을 다시 살폈다. 횡단보도 양옆에 주춤주춤 서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별다를 것 없었다. 여기가 비틀즈 앨범의 그 길인지, 영국 런던이긴 한 건지 이 사진만으로는 알 수 없다. 내가 횡단보도를 가로지르는 사진도 없다. 누군가 “여기가 애비로드 맞아?”라든가 “횡단보도 건너는 사진은 안 찍었어?”라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사진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아니다. 썩 마음에 드는 사진을 하나 건졌다. 나는 그 사진을 다시 본다. 택시 한 대가 횡단보도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애비로드까지 가서 택시 사진을 찍고 좋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사진을 좋아해줄 사람은 몇이나 되고. 하지만 알 게 뭐냐. 나는 두고두고 이 사진을 보면서 이 여행을 추억할 텐데.

구태의연한 말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말은 그럴듯한 핑계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다. 어느 여행지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남들이 하는 말보다도 내 마음이 끌리는 쪽을 따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관광안내소 직원의 대응도 마찬가지다. 내가 생각하기 나름이다. 동양인에 대한 무시일수도, A 발음의 차이에서 온 오해일수도 있다. 상대의 말에 돋친 가시는 사실 내 마음이 만든 허상인지도 모른다. 설사 진짜 가시가 있다 한들,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그 사람만 헛수고한 셈이다.

누가 뭐래도 이 세상은 내가 보고 느끼는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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