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피아노는 내가 백수가 되기 전부터 배우던 악기다. 시작한 걸로 따지자면 아주 한참 전이 된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쳐왔다. 자연스럽게도 피아노에 꿈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여러가지 문제로 그만두게 되었다. 내가 그만두고 싶어서 관둔 것이 아니라 그런지 미련이 한참 남아버렸다. 그래서 나는 성인이되어 자취를 시작하고 어찌어찌 모아둔 돈으로 디지털 피아노를 사고, 학원까지 다니게 되었다. 학원을 다니게 된 이유는, 쇼팽 <발라드 1번>곡을 제대로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 곡은 익히 알다시피 어렵다고 소문난 곡이다. 나는 전에 없던 집념을 불살라 거의 1년에 걸쳐 악보를 읽어내었다. 하지만 악보를 읽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하루종일도 연습해 보았지만, 딱히 더 느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학원을 다니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발라드 1번을 배우진 않았다. 어려운 곡을 대뜸 내밀며 치고 싶다고 하면 선생님이 레슨을 거절하실까봐 더 짧고 더 쉬운 곡으로 시작했다. 그렇게 드뷔시의 <달빛>을 치기 시작했다. 그 학원은 연말에 원생들을 모아 연주회도 가졌었는데, 나도 이 곡으로 참여했었다. 핀조명 아래 그랜드 피아노로 천천히 연주를 했고, 사람들이 쳐주는 박수에 뿌듯해했다. 좋은 기억이었다.
연주회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발라드 1번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 곡을 하겠다고 했을 때의 선생님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 묻어났지만, 그래도 허락해주셨다. 역시 혼자 틀어박혀 치는 것보다는 훨씬 낫긴 했지만, 제대로 치려니 너무 힘들었다. 나는 이 곡을 거의 1년 내내 연습했다. 너무 힘들어 중간에 학원을 잠깐 쉴 때도 있었고, 아예 다른 곡을 배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발라드 1번으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왔을즈음 <다시, 피아노>라는 책을 읽었었다. 영국 가디언지 편집장 앨런 러스브러저의 쇼팽 발라드 1번 도전기였다. 그걸 읽으면서 나도 연말 연주회에서 발라드 1번을 연주해야겠다는 작은 꿈을 키웠다. 하지만 이 책은 작가 자신이 평가하기에 엉망으로 연주회를 끝마친 걸로 결말이 난다.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찜찜해졌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 앞에서 멋지게 연주하는 꿈을 키웠는데 이런 결말이라 조금 불길한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조금 생각하다가 나는 이렇게는 되지 말아야겠다 반면교사를 삼기로 했다.
일을 그만두고서는 더 열심히 나가 연습했다. 일할 때는 매일 못나갔지만, 퇴사했으니 매일 연습할 수 있었다. 연주회때 적어도 틀리지는 말자 다짐하며 집에서도 연습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나는 <다시, 피아노>의 작가보다 더 못한 결말을 맞았다.
중간에 치다가 손의 방향을 잃어버렸다. (피아노를 쳐 본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그게 영향을 미쳐서 이후 연주는 더 엉망이 되어버렸다. 틀려도 그냥 넘어가야 했는데 자꾸 다시 치고 난리도 아니었다. 정말 울고 싶었다. 중간에 그만치고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어른이니까 꾹 참고 끝까지 쳤다. 연주가 끝나고 들리는 사람들의 작은 박수소리가 위로처럼 들렸다.
그 이후, 엉망이었던 연주회 경험때문인지 발라드 1번을 1년 내내 쳐서 인지는 몰라도, 피아노에 대한 미련이 눈녹듯 사라졌다. 얼마 못가 학원을 그만 두게 되었고, 지금은 집에 있는 디지털 피아노도 방치해둔 지 오래되었다. 가끔 다시 쳐보고는 하지만 그때뿐이다. 나는 <발라드 1번>을 치기 위해 피아노를 시작한 거였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2년이 지난 후 지금, 길을 걸어가다 피아노 학원을 보면 그때 기억이 난다. 지금은 웃기게도 다른 미련이 생겼다. 다시 배우게 되면 연주회에서 제대로 그 곡을 연주해보고 싶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