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호국보훈의 달] ‘국가유공자의 집’ 명패가 집에 도착했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국가유공자의 희생과 공헌 위에 서 있습니다. 국가유공자의 위국헌신에 대하여 국민적 감사와 존경의 뜻을 담아 명패를 드립니다.”
지난주 중 행정복지센터에서 국가유공자 명패가 집으로 배달됐다. 포장지를 열어 보니 명패에 담긴 의미를 적어 놓았다. 이 명패는 현관문 앞에 붙여 이 집이 국가유공자라는 알리게 하는 의미가 있다.
간혹 아파트 현관문 앞에 붙여진 명패를 본 적이 있다.
국가유공자이신 아버지는 벌써 저세상에 가 계시고 명패를 받고 나니, 돌아가신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국가유공자 유족에까지 명패를 전달하여 국가유공자 가족을 알려 준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버지는 1927년생이다. 6.25 전쟁이 발발하던 그해, 24세 나이로 통신병으로 입대했다. 적진을 뚫고 평양을 넘어 신의주까지 올라갔다. 그곳에서 머리에 총탄을 맞고 조기에 제대하게 됐다. 오랜 세월이 흐르며 머리에는 총탄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생활에 불편한 것은 거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상이등급은 받지 못했다. 2000년 후반에 6.25 참전용사, 화랑무공훈장을 받으며 국가유공자로 지정받았다. 지정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신체검사 등 일체 행정 서류 준비를 도맡아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우여곡절이 참 많았던 것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보훈병원 무료진료, 매월 수당, 고속도로 무료 통행 등 국가로부터 여러 가지 혜택을 받았다.
2014년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국가보훈처로부터 국가유공자 유족증을 받았다. 전국 국공립 공원 무료입장, 공공 체육시설에 감면 혜택이 주어진다. 학창 시절에 국가유공자 자녀는 많은 혜택이 있었다. 이미 직장 생활을 하는 나로서는 실질적인 혜택은 거의 없었다. 국가유공자 유족증은 상징적인 면이 강했다.
지난 6월 초에는 현충일 추념식에 참석하라고 추념 리본과 함께 안내장이 우편으로 왔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매년 6월이 되면 추념 리본과 함께 참석 안내장이 온다. 현충일 하루는 지하철 등 대중교통 무료 탑승 혜택이 주어진다.
국가유공자의 집 명패를 보며, 행정기관의 관심 덕분에 국가유공자 유족이라는 자부심을 간직하게 됐다. 단지 하나의 철판으로 볼 수 있지만, 아이들에게도 많은 자긍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둘째 아이는 명패가 신기한 듯, 내용물을 꺼내어 자세히 보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국립대전 현충원 사병묘역 구역에 안장됐다. 어머니도 함께 계신다. 설, 추석 명절에 자주 가지는 못해도 기일이 되면 간다. 갈 때마다 생각되는 것은, 살아생전 부모님의 삶이다. 평생 농사만 지으며 질곡 같은 삶을 사시다 가셨다. 이 세상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영애가 돌아가신 후 더욱 빛을 발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현충원에 안장된 부모님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국가유공자의 집 명패는 이사 가서 새집에 붙일 계획이다. 붙이면 또 다른 의미가 가슴에 다가올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