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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ey Feb 05. 2020

#30. 아늑한 요세미티 숙소, 바깥은 암흑 그 자체

[5일차_요세미티 국립공원]

요세미티 밸리 롯지(Yosemite Vally Lodge)는 일반적인 호텔과는 많이 달랐다. 우리나라의 자연 휴양림에 있는 숲 속의 집 같은 느낌이랄까. 각 건물 동이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다. 그리고 체크인, 체크아웃을 도와주는 메인 로비는 따로 위치하고 있었다. 메인 로비에 들러 이용 안내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듣고, 방으로 향했다.

5~6개의 방들이 한 개의 동으로 묶여 있었다. 나는 2층에 위치한 방을 배정받았다. 큰 캐리어 두 개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느라 정말 힘들었다. LA나 다른 바닷가 도시와는 확연히 다른 추위가 어색하기도 했다. 주로 카드 형태의 키를 제공하는 다른 호텔들에 비교하여 이 곳은 투박하게 생긴 무거운 열쇠를 나누어 주었다. 색다르면서도 자연 속에 위치한 이 숙소만의 특색을 잘 살린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방은 굉장히 아늑했다. 세련되지도, 무언가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은 없었지만 포근했다. 생각보다 방의 크기도 넓었고, 화장실도 아주 깨끗했다. 테이블도, 의자도, 조명도 산속의 느낌을 잘 살려주는 것 같았다. 이 정도의 방이라면 평소에 몇 달에 걸친 예약 전쟁이 일어날 만도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운 좋게 이 숙소를 예약할 수 있었다는 점에 다시 한번 안도했다.


짐을 풀고 피곤한 몸을 침대에 눕히자마자 '은하수 걷기 투어'가 생각났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저녁을 어서 해결해야만 했다. 불빛 하나 없는 이 곳의 특성상, 요세미티 계곡 바깥으로 나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요세미티 계곡 안에서 식사를 해결해야 했는데, 운영 시간이 딱딱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메인 로비 근처에 여러 종류의 식당이 있다는 설명을 떠올리고는 다시 그곳으로 향하기 위해 방 문을 열었다. 그런데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우선 이렇게 비가 오는데 걷기 투어가 가능할까? 아니 그전에 이렇게 비가 오는데 구름 사이로 밤하늘이 보이긴 보일까? 밤 사이에 눈 예보가 있다고 하는데 이 비가 눈이 되는 걸까? 비에 젖은 땅이 얼어붙어서 내일 계곡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체인을 드디어 사용해야만 하는 날이 온 건가?


고민을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메인 로비와 그 근처 식당들이 위치한 건물에 다다랐다. 푸드코트 같은 식당이 있었다. 간단하게 햄버거나 파스타, 피자 종류를 팔고 있었다. 요세미티에 오기 전에 월마트에서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었던 탓에 별로 내키지 않았다. 옆에 위치한 다른 식당으로 가 보았다. 조금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자유롭게 소통하는 듯한 식당이었다. 들어가려고 하는데 드레스코드가 있다는 것이었다. 셔츠를 입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어 바로 포기했다. 그렇게 남은 나머지 한 식당 앞에 도착했다.


그 식당은 아까 드레스코드가 있던 식당보다 더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더욱 차분했다. 드레스 코드가 필요하다면 아까 그 식당보다는 여기가 더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종업원에게 물어보니 이 곳은 드레스코드가 필요 없다고 하였다. 딱히 별다른 식당의 선택권이 없었기에 식당에 들어갔다.

여러 가지 메뉴가 있었지만, 추천해주는 45달러짜리 스페셜 코스를 주문했다. 사실 정신없이 주문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이때 나는 식사보다 한국에서 전해져 오는 연락에 신경을 더 쓰고 있었다. 바로 연말정산! 마침 내가 미국으로 출국하는 날부터 귀국하기 얼마 전까지가 연말정산 서류 제출일이었다. 내가 도무지 서류를 제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친구가 도와주기로 했고, 여러 가지 서류를 준비하느라 친구와 연락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문제는 이 산골짜기의 통신 상태였다. 와이파이 신호는 빵빵하게 잡히고는 있지만 아무런 통신이 되지 않는다. 그저 신호만 있을 뿐, 데이터가 이동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LTE 데이터도 내가 선택한 통신사에서는 전혀 잡히지 않았다. 휴대폰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신호 없음'이 '신호 한 칸'으로 바뀌는 그 찰나에 친구로부터 연락이 도착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몇 차례 연락을 주고받은 뒤에야 내가 시킨 메뉴를 살펴볼 수 있었다.

배도 고팠지만 시원한 맥주 한 잔이 시급했다. 친구와 맥주를 한 잔씩 시키기로 했다. 신기한 점이 맥주 이름이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유명한 경관들 이름이 붙은 맥주였는데, 나는 아마 아까 도착하자마자 인상 깊게 본 '하프 돔'의 이름을 딴 맥주를 시켰던 것 같다.


보통 코스 요리를 주문하면 각각 메뉴의 양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역시 이 곳은 미국인가 보다. 식전 빵도 한 가득, 수프도 한 가득이었다. 곧이어 나온 메인 메뉴인 스테이크는 한국에서 팔았더라면 2인분, 혹은 패밀리 세트로도 판매가 가능했을 것이다. 디저트로 나온 초콜릿이 듬뿍 들어간 빵도 두 조각이나 주는 바람에 반을 남겨버렸다.. 배가 조금만 덜 불렀다면 얼마든지 더 먹을 수 있는 맛있는 디저트였는데 말이다.

숙소에 다시 돌아가서 옷을 든든히 챙겨 입고 투어를 시작하기로 한 장소에 가기로 했다. 아까 안내를 들을 때 분명 조금만 걸어가면 된다고 했었다. 별생각 없이 나와서 걸어가는데 정말 대자연의 오싹함이 이런 걸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빗방울이 하나씩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 말고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내는 소리가 그 어디에도 반사되지 않아 영원히 나에게서 멀어져 가는 듯했다. 그만큼 고요했다. 소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시각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에서 퍼져나가는 플래시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저 바닥만 비추어줄 뿐, 바로 앞에 있는 것이 나무인지, 길인지, 아니면 바위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주변에 간간히 지나다니던 차들도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저 멀리에서 투어를 시작하기로 했던 6번 정류소가 보였다. 드디어 빛을 만났다. 만나기로 한 시간이 되었는데도 그 누구도 없었다. 예정되었던 시간에 5분 정도가 더 흘렀을 때, 누군가 다가와서 말을 해 주었다. "오늘 투어는 비가 와서 취소가 되었습니다. 내일 로비에 가서 환불을 받으세요."


이 정도로 빛이 하나도 없는 곳이야말로 은하수를 감상하기는 최적의 장소일 것이다. 예전에 호주에 갔을 때 어렴풋이 은하수를 본 적이 있다.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가는 데, 조금은 외곽 동네여서인지, 주택가의 늦은 밤이어서인지 주변 빛의 방해 없이 하늘의 별들을 볼 수 있었다. 정말 겹겹이 위치한 수많은 별들이 무서울 정도로 쏟아지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날씨만 좋았더라면 인생 최고의 경험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인생 최고의 무서움은 이제 또 경험해야 했다. 다시 돌아가야 하니 말이다. '암흑'과 '무'의 공간을 지나 무사히 숙소에 도착을 했고, 예상보다 일찍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밤 사이 눈이 오지도 않게 해 주세요. 비가 얼어붙지도 않게 해 주세요. 내일은 날이 맑아서 요세미티 국립공원 좀 제대로 보고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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