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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ey Feb 06. 2020

#31. 떠날 때가 되어서야 제 모습을 보여준 요세미티

[6일차_요세미티 국립공원]

평소 아침밥보다는 포근한 잠, 부지런한 아침보다는 여유로운 아침을 좋아하던 나지만 오늘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요세미티의 모습을 마지막까지 눈에 부지런히 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여섯 시쯤 알람을 맞추어두었고, 눈이 바로 떠졌다.

어제 체크인을 하면서 전기가 나간다는 말을 얼핏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씻고 나와서 옷을 입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모든 전기가 나가버렸다. 아직 해가 제대로 뜨기도 전이라 너무 캄캄했다. 급한 대로 휴대폰의 플래시를 켜 놓고 부랴부랴 준비를 했다.

태양은 참 신기한 것 같다. 움직임을 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빠르게 움직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두컴컴하던 온 동네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옷을 갈아입는 그 찰나에 세상은 또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방에서 나와 어제저녁을 먹었던 메인 로비 근처로 가 보았다. 점차 밝아지는 아직은 어둠이 조금 남아 있는 하늘과, 수많은 나무들, 그리고 사람이 만들어 놓은 건물과 불빛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푸드코트 형식으로 운영하는 식당 안에 스타벅스가 있다. 스타벅스에서 따뜻한 커피와 빵으로 아침을 간단하게 해결하기로 했다. 라떼와 크로와상을 주문하여 테이블을 하나 정해 앉았다. 창 밖으로는 밝아져 가는 요세미티의 아침 풍경이 큰 창을 통해 들어왔다. 작은 동물들이 이리저리 나무를 타며 돌아다니는 모습도 보이고, 어느 노부부가 산책로를 따라 아침 산책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일정에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차에 올랐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여러 가지 절경들이 있다. 그 절경들은 거의 모두 이 곳, 요세미티 밸리 롯지에서 금방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사실 그래서 이 숙소를 결정한 것도 맞다. 날도 쌀쌀하고, 시간도 아깝고 해서 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요세미티 계곡 내부는 웬만한 길이 모두 도로로 잘 깔려있다. 그래서 차를 타고 대부분의 뷰포인트까지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다. 나도 도로를 타고 가다가 마음에 드는 곳 여기저기에 차를 세우고 경치를 오래 바라보곤 했다.


높고 뾰족하고, 혹은 위에 움푹 파인 모양이 있는 것만 산이라고 생각했었다. 내 눈 앞에는 분명 산인데, 내가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의 산들이 있었다. 아니, 나를 감싸고 있는 병풍처럼 서 있었다. 워낙 뭐든 스케일이 큰 미국이기에 그럴 수 있다 생각하고, '이게 역시 대자연의 모습이구나'하며 감탄하고 있는데 산 꼭대기에 있는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온통 바위로만 이루어진 저 산 꼭대기에도 여러 종류의 나무가 무리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었다. 놀라움과 동시에 저 산 꼭대기에 올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실제로 몇몇 사람들은 등산 장비를 전문적으로 챙겨 와서 어디론가 올라가곤 했다. 저런 산 꼭대기에 가는 길인지, 다른 뷰포인트에 방문하는 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모습에 익숙한 우리에게 그 안으로 직접 들어가 보려고 시도하는 그 사람들의 행동이 정말 멋있게 느껴졌다.

정말 다행인 것은 밤 사이 눈이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저녁시간에 내리던 비도 밤 사이 그친 것 같았다. 온도도 생각보다 낮아지지 않아서 얼거나 하는 상황은 없었다. 그리고 해가 점차 떠오르면서 안개가 걷히고 하늘은 파랗게 맑아져 갔다. 요세미티가 드디어 제모습을 보여주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그렇게 기분 좋게 다른 곳을 돌아보기 위해 운전하던 중 너무나도 멋있는 풍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갈색 잔디 같은 식물로 덮인 넓은 들판, 한쪽 구석부터 점차 파란색으로 변해가는 높은 하늘, 사방을 뒤덮은 높은 바위산들이 이어져가며 만들어내는 멋진 풍경까지. 너무나도 근사했다. 그리고 아주 행복했다. 비교적 추운 날씨였지만 거의 한 시간 가까이를 이 들판에서 사진을 찍으며, 풍경을 감상하며 보냈던 것 같다.


요세미티 밸리가 넓다고는 하지만 모든 길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지도를 보지 않고 그저 길로 가고 싶은 대로 운전해보기로 했다. 지도에 나타나 있지 않은 새로운 명소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들었다. 한 10분 정도를 길을 따라 쭉 나아갔을까, 막다른 길이 보였다. 큰 'STOP'사인이 자동차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그 뒤로는 정말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가로수길이 펼쳐져있었다. 차를 옆쪽 캠핑장 주차장에 세우고 걸어서 그곳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출입 자체를 통제한 곳은 아니었다. 공원에서 운영하는 버스나, 장애인 차량은 통행할 수 있으며, 보행자에 대한 제재는 없었다.


아무런 자동차도, 사람도 지나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하늘 높이까지 솟아오른 나무들에는 여러 종류의 새들이 붙어 소리를 내고 있었다. 국립공원이고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곳이라 한 가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위험한 야생동물이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조금 더 걸어가자 미러 레이크(Mirror Lake)에 방문할 수 있는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서 있었다. 차를 타고 갈 수 없으니 1마일이 조금 넘는 거리를 걸어가야 했다. 잠시 걸어서라도 다녀올까 고민이 되었지만 두 가지 이유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체크아웃 시간 때문이었다. 정해져 있는 체크아웃 시간 때문에 걸어서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길을 다녀오기는 부담으로 느껴졌다.


또 한 가지는 바로 야생동물이었다. 미러 레이크를 설명하는 표지판에 이 곳에 종종 Mountain Lion이 출몰한다고 나와있었다. '산 사자'가 뭐지 하고 궁금해하며 찾아보니 바로 퓨마였다. 정말로 야생동물을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야 낮겠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위험을 감수하지 말자며 다시 차로 돌아왔다.

요세미티 폭포를 보러 가기로 했다. 차를 앞에 세우고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 두 가지 갈림길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요세미티 폭포"였고, 하나는 "폭포 보는 곳"이었다. 폭포를 보는 곳이 더 잘 보이지 않겠냐 싶어서 "폭포 보는 곳" 방향으로 조금 더 걸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 덩그러니 벤치가 두어 개 놓여 있었다. 실제로 그 벤치에서 폭포가 잘 보이긴 했는데, '설마 이게 다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 여기 있는 길로 조금 더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조금 더 들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누가 봐도 길이 아닌데, 울퉁불퉁한 돌을 밟고, 통나무를 건너가며 폭포 소리를 따라 걸어갔다. 폭포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는데 폭포의 모습은 점점 사라져만 갔다. 점심에 가까워진 아침시간인데도 점점 주변은 어두워졌다.

뒤를 돌아봤을 때, 더 이상 여기는 우리가 가면 안될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길인 줄 알고 걸어왔던 곳을 돌아보니 그저 고립되기 딱 좋은 산 골짜기 안이었다. 이 장소까지 들어오면서 보았던 통나무, 부러진 나무들, 흔들거리는 돌이 있던 웅덩이 등을 기억해내서 다시 원래 장소인 벤치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벤치에서 다시 한번 폭포를 보며 생각했다. 더 자세히 보겠다고, 더 크게 보겠다고 정해진 범위를 벗어나서 욕심을 내다보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폭포뿐 아니더라도 항상 욕심부리지 않는 생활을 해야겠다.


다시 갈림길로 나가서 "요세미티 폭포"라고 쓰인 반대편 갈림길로 향했다. 걷기 편한 데크로 되어 있었다. 사슴 가족도 살고 있었고, 어디선가 굴러내려 온 집채만 한 바위도 지났다.

길을 제대로 선택하고 나니 큰 어려움이 없더라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편하게 데크가 깔린 길을 걸어왔음에도 아까 선택했던 길보다 더 가까이에서, 더 선명하게 폭포를 볼 수 있었다.


요세미티 폭포는 여름에 물줄기가 대단하다고 한다. 겨울에 쌓인 눈이 녹아내리면서 여름까지 엄청난 물줄기를 뽐내는 것 같다. 다행히도 어젯밤에 비가 조금 내려서인지 폭포가 아예 메마르지는 않았다. 문득 여름에는 아까 내가 잘못 선택했던 그 길이 모두 여름에는 물에 잠기는 곳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름이었더라면 헷갈리지 않았을까.

요세미티 폭포의 풍경을 눈에 확실히 담은 채로 다시 차가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어느새 하늘은 새파랗게 변해있었다. 햇살도 따스했고 어제와는 다르게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예상대로라면 오늘 요세미티를 내려가는 동안 체인을 장착했어야 한다. 해본 적 없는 체인을 장착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크게 느껴졌다.

체크아웃을 마치고 어제 취소되었던 '은하수 걷기 투어'도 환불을 받았다. 요세미티를 이제 떠나려고 하니 이 풍경들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아쉬운 마음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하프돔'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기회가 된다면, 아니 기회를 만들어서 여름에 한 번 더 이 곳을 찾고 싶다. 조금 더 파릇파릇하고 선명한 하프돔을 지금보다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꼭 만들 거다.


체인 없이, 아무 걱정 없이 내려왔다. 교통 통제도 없었고 오히려 날이 너무 맑았다. 어느덧 이 여행은 마지막 한 도시만을 남겨두고 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공항이 있는 그곳, 샌프란시스코다. 샌프란시스코까지는 또 긴 시간 운전을 해야 한다. 우선 체인을 환불받을 수 있는 머시드의 월마트에서 운전을 교대하기로 하고 출발했다.


요세미티야 안녕. 금방 다시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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