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도, 앞으로도, 계속.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평균적인 성인은 매일 약 35,000번 정도의 의식적인 선택을 하고 살아간다고 한다. 같은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하루에 음식과 관련하여 내리는 선택만 해도 227번이나 된다고 한다. 우리는 선택과 선택 사이를, 그리고 선택에 따른 또 다른 선택지를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자각하지는 못하는 편인 것 같다.
인생에서 무언가를 선택해 본 경험을 물어본다면 대부분 굵직굵직한 이벤트를 이야기할 것이다. 어느 대학에 진학하기로 선택했다거나, 결혼을 하기로 또는 하지 않기로 선택했다거나, 앞으로 살아갈 집을 어디로 어떠한 이유로 선택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오고 갈 것이 분명하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오른발을 먼저 내딛기로 했다거나, 커피를 마시다가 눈길을 시계로 돌리기로 했다는 선택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선택이었는 줄 모르고 넘어가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남들이 다 그러하듯 나 또한 '선택하는 인생'을 떠올린다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결과는 몇 가지 없다. 우리의 인생에, 삶에, 하루에 무수히 많은 선택이 있을지라도 오늘만큼은 '굵은' 선택, 나의 인생을 바꾸었다고 할 만한 선택들에 집중해보려고 한다.
첫 번째 기억나는 선택은 고등학교 진학이다. 선택, 또는 결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당시 우리 지역에서는 '고교 평준화'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 말은 중학교 때의 성적을 이리저리 분석하고 비교해서 지역 내의 모든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을 순서 짓는다는 것이다. 그 순서에 따라 고등학교를 원하는 대로 지망할 수 있었는데 물론 각 고등학교에도 성적에 따른 순위가 있었다. 가장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물론 '특목고'에 진학했다. 그리고 남은 학생들은 '공부를 가장 잘하는 학교', 다시 말해 '서울대학교 잘 보내는 학교'로 인식하고 있는 A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그다음 성적순위를 지닌 학생들은 B 학교로, C 학교로... 대학 입시를 자주 마주하는 고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들에게 나름의 노하우와 '촉'이 있는 것처럼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들에게도 노하우와 '감'이 있었다. 대충 몇 등부터 몇 등 사이에 있으면 안전하고, 또는 위험하다는 기준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중학교 때 공부를 잘하지도, 못 하지도 않았다. 평소에도 항상 반에서도 중간, 학교에서도 중간 정도 성적을 받았던 것 같다. 이게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의 3년 점수를 모두 합치다 보니 중간보다는 살짝 높은 성적을 갖게 되었다. 담임선생님과의 상담에서는 애매한 등수라는 평을 듣게 되었다. A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는 있지만, 말 그대로 '문 닫고 들어가는' 꼴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가서 공부 열심히 하는 친구들을 보며 자극을 받아 충분히 더 잘 될 수 있다는 전망도 꼭 덧붙여 주셨지만,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아마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음속으로는 이미 결정을 내려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C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C 고등학교는 집에서는 거리가 조금 있는 외곽의 사립 고등학교였다. 어떤 마음으로 진학하기로 결정했는지 명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마냥 성적과 관련된 이유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기억에 남는 첫 번째 선택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이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생활을 했기에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다. 지금의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고, 고등학교 졸업 후 겪게 되는 수많은 상황과 선택과정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 첫 번째 선택 덕분에. 다사다난했던 고등학교 생활 이야기도 언젠가 이렇게 글을 통해 나누어보고 싶다.
두 번째 선택은 대학 진학이었다.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 큰 방법이 있었다. 내신과 수능. 나는 수학을 싫어한다.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싫어한다. 웬만한 계산은 컴퓨터가 해주는 마당에 연필로 몇 줄씩 '오류와 실수를 범하는 내 손과 머리'를 통해 식을 써서 풀어내야 하는 과정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다. 사실 엄청난 노력을 했었다. 학원도, 과외도 해보았다. 학교 중간고사, 기말고사 문제는 배운 대로 복습을 해서인지 잘 풀 수 있었으나, 수능 유형의 모의고사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수능 수학영역에서 평균적으로 50점을 넘기는 일이 몇 번 없었을 정도다. 수능 유형의 문제는 자신이 없고, 학교 내신 시험 문제는 자신이 있다는 판단이 서자 나는 '수시'를 노려보기로 했다.
중학교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중간 이상으로 올라가 보지 못했던 내가, 어쩐 일인지 고등학교에서는 상당히 상위권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물론 내신에서 말이다. 엄청나게 재미있게 고등학교 생활을 즐기고, 친구들과도 자주 놀고, 다사다난한 고등학교 생활을 하면서도 이상하게 내신만큼은 열심히 챙기게 되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입시 철이 다가왔을 때, 그 당시까지 딱 수시전형 지원에 개수 제한이 없었기에, 나는 열한 군데의 대학, 학과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수능 최저 등급이 있었기에 걱정을 많이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최종 합격 결과가 나왔을 때는 웃을 수 있었다. 지원서를 넣고 면접 또는 논술을 보고, 수능 최저 합격 점수를 맞추어야 하는 과정 끝에 다섯 군데의 대학교 학과에 합격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세 번째 선택이 있다. 진주교육대학교를 선택한 것. 나는 교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크게 간절하지는 않았다. 교사가 되기 싫었다기보다는, 진로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도, 희망하는 직업도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지원한 열한 군데의 학과 중 교육대학교는 딱 두 군데였다. 나머지는 일반 대학교의 일반 학과. 어디가 되었든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 A대학교의 경영학과, B대학교의 부동산 행정학과, C대학교의 법학과, D대학교의 영어과, 그리고 진주교육대학교의 초등교육학과.
A, B, C, D 대학교 또한 성적에 맞추어 적기도 했지만, 정말 가고 싶은 대학들이었다.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는 아니지만 '그래도 잘 갔네' 소리 들을 수 있는 커다란 대학들. 현실적인 선택을 위해 추려보기로 결심했을 때 내 손에 남은 선택지는 딱 두 개였다. D 대학교의 영어과, 그리고 진주교육대학교. 나의 앞선 선택이 그러했듯 이번 선택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깊은 고민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마음속의 '응, 그래'라는 끄덕임 한 번에 진주교육대학교에 등록을 하게 되었고, 선생님이 될 나름의 도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의 대학 생활을 두 수식어로 정리하자면 '생기발랄'과 '우당탕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바빴다. 즐겁기 위해 바빴고, 무언가에 항상 도전하기 위해 바빴다. 대학생활을 마칠 때, 교대생이 겪어야 하는 가장 큰 관문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임용시험. 임용을 친구들과 스터디를 이루어 열심히 준비했다. 엄청난 부담감을 느끼며, 정말 하루 쉬는 것도 불안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열심히 시험 준비를 하고 시험을 한 달 정도 남겨 두었을 때, 또다시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네 번째 선택은 시험을 치를 지역 선택이었다. 경상남도에 위치한 진주교육대학교. 교육, 교직과 관련된 수많은 추억이 남아있는 곳. 게다가 나는 선생님이 될 준비를 이곳 경상남도의 제도에 맞추어해 왔다. 경상남도 교육청에서 진행 중인 이런저런 사업과 제도에 맞추어 실습을 다녀오고, 공부를 하고, 특강을 듣고. 학교 생활을 하며 만나게 된 동기들, 친구들, 선배들, 후배들, 교수님들, 실습 담임 선생님,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어린 학생들까지 이곳에 있었다.
임용 시험을 치를 장소는 딱 한 군데만 선택해서 지원해야 한다. 예전에는 여러 군데 지원을 해 두고, 당일에 어느 지역에 응시하러 가는지에 따라 다른 곳의 지원서가 취소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나는 그 방식은 정말 별로다. 어쨌든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집'에 가야 하나, 이곳에 남아야 하나. 위에서 말한 이곳에 남게 되는 모든 사람들 장소들 추억들과, 대학에 오기 전 평생을 살아온 내 고향이 맞붙게 된 것이다. 결과는 뭐 모두가 알고 있듯 '집'이 있는 고향이 이겼다. 지원서를 내고, 시험을 보고, 1차 합격자 발표, 2차 시험, 최종 합격자 발표를 겪었다. 그렇게 선생님이 되었다.
다섯 번째 선택은 군 복무였다. 임용을 준비한다고, 임용 제도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교대생들은 웬만해서는 중간에 휴학을 하지 않았다. 임용에 합격하고 발령을 받은 뒤에 군대를 가는 일련의 과정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느껴졌기에 나도 그러한 선택을 했다. 군대를 가는 방법도 정말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다.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의경, 의무소방, 공익까지. 물론 공익, 그러니까 사회복무요원은 뭐 선택하고 싶다고 선택할 수 있는 그런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이전 선택이었던 고등학교 진학에서 나는 한 친구를 만난다. 10년이 더 넘게 흐른 지금까지도 아주 가까이 지내는, 이제는 서로의 자리에서 서로의 업무 분야를 통해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가 된 아주 고마운 친구. 그 친구가 대학생 때, '의경'에 함께 가자고 제안했던 적이 있다. 여러 이유를 들며 의경에 갔을 때 좋은 점을 알려주었고, 나도 교대생이 대부분 휴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함께 하기로 약속했었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었기에 나는 의경 시험에 지원했고, 의경으로 입대를 하게 되었다. 의경을 가게 된 것이 내 인생 기억나는 다섯 번째 선택으로 꼽힐 정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의아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한 마디만 덧붙이고 싶다. '다시 가고 싶을 만큼 좋았다.' 실제로 나는 복무를 마치고 교직으로 돌아왔을 때, 굉장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교직을 계속 이어가야 하나, 아니면 의경, 아니지 의경을 다시 갈 수는 없으니 경찰 시험을 준비해볼까 하는 고민을. 물론 교직에 남자는 선택을 했다는 것을 모두가 알겠지만.
그 뒤로도 정말 많은 선택과 경험과 실수와 성취가 있었다. 지금도 진행 중이고 예정되어 있는 것들도 많다. 이러한 선택들 덕분에 나는 지금 아주 바쁘게, 부지런하게, 무언가를 작게나마 이루어내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만약 저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일어나지도 않을 고민을.
언젠가 지금처럼 내 인생에서 기억에 남는 선택이라며 더 많은 사례들을 늘어놓는 계기가 오겠지. 오늘 이후의 선택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매일 하는 35,000번가량의 선택 중 어떤 선택이 나의 내일의 방향과 색을 다르게 만들어 줄까. 매 선택에 신중하기는 어렵지만, 선택을 믿어주기는 쉽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내가 이미 내려버린 선택에 확신을 심어주고, 이유를 만들어주고, 추억을 덧붙여주자.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선택과 다음 선택 사이에 살아야 하는 우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