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무관심

나만 살자. 나라도 살자.

by 신정훈




흔히 중국인들은 남의 일에 무관심하다고 합니다. 자신의 문제(특히나 경제적인 문제)엔 호들갑을 떨며 부산스럽지만, 자신과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는 철저히 무관심하다고들 해요. 정말 그럴까요? 저는 이 질문의 답이 늘 궁금했습니다. 북경에서 만나는 이들은 언제나 저를 빤히 쳐다보며 관심을 넘어선 호기심을 보였으니까요.


최근엔 스마트폰 등의 영향으로 많이 사라졌지만 예전엔 정말 심했었죠. 지하철을 타도, 식당에 앉아있어도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이들이 최소 한두 명은 항상 있었으니까요.(잘생겼다는 것은 이토록 피곤한 일이다.) 스치듯 잠시 바라보는 게 아니죠. 뭔가, cctv처럼 봅니다. 아.. 저 사람이 나를 원자단위로 분석 중인가 보다. 싶을 정도로 말이에요. 지하철이라면 제가 객차에 올라 목적지에 내릴 때까지 달리는 내내 제 얼굴을 바라보는 거예요. 불편한 기색을 내비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인정사정없이 바라보다 저의 어떤 행동에 웃거나, 니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쉰 뒤 참견하거나 하는 것이죠. 물론 제가 자주 만날 수 없는 외국인이라 그럴 수 있어요.(다행히 웃기게 생겨서만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외국인이 아니라 옆자리에 고릴라가 앉아있었다 해도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곤란한 겁니다. 그런 관심은 고릴라도 싫어하거든요.


아무튼 중국 사람들은 어떠한 문제(혹은 현상)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는지 주의 깊게 지켜보는 성향이 있어요.(그 문제를 누군가 나서 해결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상대방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이 없다면 어찌 바쁜 시간을 쪼개 그러고들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남에게 철저하리만큼 관심이 없다니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요. 저는 늘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적어도 시단의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天安门广场

중국인들은 단합이 안 되는 모래 알갱이 같아 축구 같은 팀 스포츠엔 맞지 않다라는 중국 축구팬들의 자조 섞인 이야기도 있지만 의외로 단체로 행동하는 것에 익숙하다. 아마 과거 공산주의 특유의 공동생활이 그러한 습관을 갖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강제적인 집단생활은 오히려 자기 주도의 공조에 반감을 갖게 하지 않았을까. 물론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무더운 한여름 시단의 인도에 한 젊은 여성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의식은 있었지만 쓰러진 몸을 스스로 가누지 못했죠. 단정한 옷차림으로 봐선 노숙자로 보이진 않았고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 쓰러진 것으로 보였어요. 그녀의 주위엔 벌써 수십 명의 사람들이 둥그런 원을 그리듯 모여 있었고요. 하지만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음에도 그들 중 나서서 그녀를 부축하거나 업고 병원으로 뛰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직 그녀 주위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그녀에게 간간이 질문을 하거나 심각한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더군요.(간간이 언성도 높이면서)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누군가 맨홀에 빠진 동전이라도 줍는다고 엎드려 있고, 그것을 구경하거나 기다리는 그런 평범한 모습 같았죠.(맙소사!)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누워있는 아가씨는 점점 말수나 움직임이 줄어들었고 상황을 잘 모르는 제가 보기에도 지금 당장 병원으로 보내야 할 것 같았어요. 인공호흡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고개를 젖히고 기도라도 확보해야 할 심각한 상황으로 보였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아요. 말이 통하지 못해 그녀의 정확한 상태를 알 수 없는 저로서는 그저 발만 동동 구를 뿐, 그렇게 소중한 시간은 흘러만 갔습니다.




자금성

자금성을 지키는 무경들의 행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전까진 성내에 그들의 훈련장과 숙소가 있었다. 심지어 농구장도 있었는데 굳이 성내에서 경찰들이 농구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며 이십여 분이 더 흘렀을까, 마침내 싸이렌도 없이 공안 차 한 대가 도착합니다. 앰뷸런스가 아닌 공안, 우리네 경찰차 말입니다. 차에는 모두 세 명의 공안이 타고 있었는데 운전석의 한사람만이 느릿하게 내려 쓰러져있는 아가씨를 힐끗 쳐다보고는 주위 사람들에게 상황을 묻는가 싶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합니다.(차 안의 두 사람은 계급이 조금 높아 보였는데 그녀를 쳐다만 볼 뿐 내리지도 않는다.) 통화를 끝낸 공안은 인상을 쓰며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쫓아내더군요.(정말이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清华园

구경해도 됩니다. 궁금하면 봐야죠. 대상이 풍경이든 사람이든 뭐가 중요하겠어요. 하루종일 쫓아다녀도 되요. 그러니까 제발 그런 무서운 표정만 짓지 말아 주세요.




저도 사람들과 함께 그 자리에서 쫓겨났고 그 이후의 상황은 모릅니다. 단지 자리에서 쫓겨나기까지 30분이 넘는 동안은 물론, 제가 오기 전까지 가늠할 수 없는 시간까지 더해 길가에 쓰러진 아가씨는 아무런 도움 없이 방치되었다는 겁니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구경만 할 뿐 도움은 주지 않았던 거예요. 괜히 나섰다가 귀찮아질까, 혹은 혹시라도 손해를 볼 까 싶어 사람이 쓰러져있는데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던 겁니다. 여행자로서 이런 모습을 대하게 되면 무섭기도 하고 아무리 몸이 아파도 중국의 길거리에서만은 쓰러지지 말아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죠. 하긴, 한국에서라고 무거운 제 몸뚱이를 업고 병원으로 달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 정도는 거뜬히 업고 달릴 수 있는 강호동, 최홍만 같은 사람을 타국에서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아마 제로에 수렴하겠죠. 뭔가 슬프네요.



帽儿胡同

북경의 거리를 걷다보면 길거리에 홀로 앉아 있는 사람들 쉽게 만나게 되는데 이들은 거의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고 높은 확률로 일거리를 찾아 대도시로 나온 외지인들이다.




2006년 난징시, 한 할머니가 버스를 타려다 넘어져 길에 쓰러졌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쉬수란. 마침 버스에서 내리던 펑위라는 26세 청년이 할머니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해줍니다. 병원비가 없었던 할머니를 위해 기꺼이 병원비도 빌려줬고요. 하지만 이후에 할머니의 골반에 실금이 발견되면서 고액의 병원비가 나오게 되자 할머니는 돌변해 자신이 다친 이유가 펑위가 밀어서라며 경찰에 거짓 신고하게 됩니다. 자신을 업고 병원으로 데려온 그 고마운 청년을 오히려 가해자로 몰았던 것이죠. 순전히 병원비 때문에요. 더욱이 정신적 피해까지 배상하라며 한화로 총 2,600만 원이란 거금을 요구했어요. 지금도 큰돈이지만 당시 중국에선 정말 엄청난 금액이었죠. 당시 난징시의 물가라면 변두리 집 한 채는 거뜬히 살 수 있는 큰돈이었으니까요. 이 사건은 연일 방송에 보도되며 전 국민의 관심을 끌었고 여론은 사고의 정황과 주변 목격자들의 진술을 근거로 다행히 펑위 편을 들게 됩니다. 하지만 쉬수란 할머니의 입장은 강경했고 사건은 결국 법정까지 가게 되었어요. 그 일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법원의 판단은 기가 막혔습니다. 펑위가 다친 할머니를 그녀의 가족들에게 인계하지 않고 병원에 데려온 행동이 수상하다며 할머니에게 한화로 1,100만 원을 배상하라 판결합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결과는 전 국민의 분노를 샀고 결국 언론과 사람들의 과도한 관심이 부담되었던 양측은 펑위가 할머니에게 한화 약 200만 원을 건네는 것으로 합의하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서 사건이 잊히길 기대했던 양측의 바람과는 달리 할머니의 집엔 매일같이 사람들이 몰려와 욕설을 퍼부었고 펑위 역시 정상적으로 직장생활이 불가능해져 결국 두 명 모두 멀리 이사까지 가야 했습니다. 사건을 판결했던 판사는 지방으로 좌천되었고요. 당시 법정에서 펑위가 울먹이며 했던 최후진술은 지금까지도 중국인들 마음속에 깊이 박히게 됩니다.

“앞으로 착한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후에도 비슷한 일들은 계속 일어납니다. 펑위-쉬수란 사건의 판결이 숨어있던 그들의 나쁜 마음을 부추겼던 것이죠. 당시 법원의 판결이 향후 비슷한 사건의 판례가 되어 줬으니까요. 아예 돈을 목적으로 착한 사마리아인을 찾는 나쁜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보험사기단처럼 행인이나 지나는 차에 일부러 뛰어들어 돈을 뜯어내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게 된 것이죠. 쉬수란 할머니의 욕심과 잘못된 법원의 판결 때문에 사회가 개판이 되어 버린 거예요. 결국 이 펑요와 쉬수란 사건은 중국의 시민의식을 50년 이상 후퇴시켜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죠.



햇볕도 잘 들지 않는 어느 건물 지하에 국화 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창문을 가린 쇠창살 너머의 국화는 잊고 지내던 심연 속 깊은 슬픔을 떠오르게 한다. 아니 쓸쓸함인가.




웨이관(圍觀)문화. 길에서 아픈 사람이나 범죄를 목격하더라도 절대 돕지 않으려는 현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자칫하다가는 펑위의 꼴이 날 수 있으니까요. 아무도 돕지 마라.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절대 모르는 남을 돕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노인이 길에 쓰러져 있어도, 아이가 차에 치여도, 같은 엘리베이터를 탄 여성이 성추행을 당해도, 어린아이가 유괴되는 현장을 목격해도 이제 더 이상 나서는 사람은 없게 됩니다. 나만 살겠다는 이기심이라기보다는 그들 내면 깊숙이 박힌 공포심 때문이겠죠. 하지만 아무리 사회에 충격을 줬던 사건일지라도 잘못된 판결 하나가 13억 인구 모두의 의식을 한순간에 바꿔버릴 수 있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들 내면엔 이미 더 큰 공포가 자리 잡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그들 내면의 깊은 공포심은 무엇이었을까요.



什刹海

그동안 여러 차례 북경을 방문하면서 가장 아찔했던 순간. 두꺼운 철문에 난 작은 구멍으로 바깥을 주시하던 무경이 자신이 촬영 대상임을 눈치채자 철문을 열고 나와 내게 총을 겨누었다. 세상에 총이라니! 북경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 중 하나가 정부 기관과 관련 인사에 대한 사진 촬영이고 반간첩법이 시행되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공산당 간부들이 모여있는 중난하이 근처는 아예 얼씬도 말자.




중국은 문화대혁명을 겪었습니다. 그 전엔 문화혁명의 예고편인 백화제방/백가쟁명(百花齊放·百家爭鳴)운동과 반 주자파 운동도 있었죠. 문화대혁명이라, 이름 참 근사하네요. 줄여서 문혁이라고도 불리는 이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혁명이라는 이름하에 죽임을 당하였고 그들 대부분은 시대를 이끌던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각 분야에서 인민들을 앞장서 이끌던 사람들이었던 것이죠. 상당수는 과거 항일운동에 앞장서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에 이바지한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비리나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가족, 가르치던 학생들에게 끌려 나와 맞아 죽거나 유배되었어요. 그들 대부분의 죄목은 단지 잘났다는 것뿐이었습니다. 평범한 중학생이 평소 앙심을 품었던 여교감의 머리채를 잡고 운동장에 끌고 나와 돌을 던질 때, 앞에 나서서 그 학생을 말릴 수 있는 선생님은 없었습니다. 나서면 혁명이라는 이름하에 함께 죽게 될 테니까요. 혁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혁명에 저해되는 불순세력으로 몰려서 말이죠.

문혁의 예고편이었던 백화제방·백가쟁명(百花齊放·百家爭鳴)운동과 이에 연결되는 반 주자파 운동도 시작은 근사했습니다. 새로운 나라는 세워졌는데, 막상 천국일 줄 알았던 인민들의 나라 공산주의 중국은 그다지 근사하지 않았어요.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온 인민들에겐 과거의 청나라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거예요. 여전히 먹고 살기 힘들었죠. 오히려 마오의 망상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대약진 운동 등을 통해 살림살이는 더욱 팍팍해지기까지 했고요. 표현이 너무 애교스럽네요. 팍팍한 살림살이라니. 대약진 운동 기간 동안 무려,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었어요. 불과 3~4년 만에 수십, 수백 명이 아니라 수천만(자료마다 조금씩 수치가 달라지지만 2천5백만에서 3천만 사이) 명이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은 겁니다. 멀쩡했던 가족과 친구들이 죽어 나가니 고대로부터 참고 살도록 강요되고 길들어진 인민들이었다 해도 당연히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겠죠. 그러나 그간의 공산당의 폭력성을 잘 봐온 그들로서는 터져 나오는 불만을 가까스로(수천만 명이 죽어 나간 기근에도 살아남았는데 이제 와 충 칼에 죽기는 너무나 억울하기에) 참고 있던 차에, 웬걸? 마오가 한마디를 해주네요.


“불만 있어? 그럼 다 말하라 해~ 다 들어 줄 테니 뭐든 자유롭게 말하라 해~”


공산당이 문제였어. 아니, 정확히는 우리 동네 당 간부가 문제였어. 역시 “마오님은 러블리하게 마오님 해~ 위대하다는 소리지~” 하며 여기저기서 그간의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마오의 계략대로 인민들은 그동안 그들을 탄압해 온 공산당과 마오를 분리해 생각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리고 그간 쌓였던 인민들의 모든 불만은 공산당 말단 간부들에게 돌아가게 되었죠. 그 선봉은 중국에서 누구보다 똑똑하다는 북경대 학생들이었음은 당연했겠고요. 그들은 날마다 저녁이면 교정에 모여 난상토론을 벌이게 됩니다. 토론이라기보단 사실상 일방적인 성토의 자리였겠죠. 물론 처음엔 잘못한 당사자가 들어도 기분이 나쁘지 않을 수준의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중국인들에겐 참을성과 나름(?)의 예의가 있으니까요.


“음, 공산당은 공산당이라서 공산당해요~”

“인민복은 디자인이 너무 구리다구요~”

“만두를 줬으면 간장도 줘야죠~”


그러나 이러한 토론은 날이 갈수록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르게 마련이고 종국에는 거침없는 내용, 표현이 난무하게 됩니다. 그동안 억눌렸던 불만들이 흡사 둑이 무너지듯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던 거예요.


“아, 공산당은 바보천치야! 머저리라구!!”

“그들을 인민 앞에 세워! 자아비판을 시켜야해!!”


“공산주의 따위, 다 집어쳐!!!”





자금성

자금성의 외곽경비를 맡은 무경들의 행진. 외국인이 많이 찾는 명소를 담당하는 무경들은 특히 인물을 중시해 선별한다.




며칠간 수위를 조절하며 찔끔찔끔 쨉을 날려 봤는데 누구 하나 잡혀가거나 모임이 봉쇄되지 않았기에 젊고 똑똑한 학생들은 당과, 마오를 더욱 믿게 됩니다. 마오의 말은 진심이었고 잘만 하면 이번 기회에 당과 사회의 부조리가 사라지겠구나. 당과 간부들에 대한 그들의 열띤 비판은 그러한 마오에 대한 강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죠. 지금의 이념적 모순과 사회의 여러 문제들은 마오의 과오가 아닌, 썩어 문드러지고 여전히 남아 있는 제국주의 잔당들의 잘못일 뿐이자 이념적으로 여전히 성숙하지 못한 일부 당간부들의 잘못이다.

우리 뒤엔, 당과 마오가 있다.

그러다...


쾅!


끝.





清华路

북경대를 둘러 흐르는 작은 운하. 린자오는 공안들을 피해 이 운하를 따라 북경 서북쪽으로 뛰었다고 했다. 하지만 끝내 체포되어 감옥에서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다.





아무런 예고 없이 하루아침에 토론회는 봉쇄되고 모여든 청중들을 상대로 공산당과 시국에 대한 비판에 열을 올렸던 연사들은 하나둘 학교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다시는 아무도 그들을 볼 수 없었고 운 좋게 몇 달 만에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던 학생들에게선 더 이상 과거의 활기찬 모습은 찾을 수 없었어요. 대부분은 자퇴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갔거나 개중에는 실어증에 걸린 학생들도 있었죠. 그들 중 한 명이자, 가장 유명한 인물이 바로 “펑 린자오”양이었고요. 그녀는 국가와 공산당의 정의를 부르짖다 국가와 공산당의 부정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쉽게 말해, 마오를 믿고 사회의 부조리와 당의 과오를 지적했다가 마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에요. 이쯤 되면 국가가 아니라 깡패죠. 아니, 살인잡니다.


지금까지 중국 정부는 자신들이 한 짓에 대해 사과하지도, 그녀의 업적을 인정하지도 않고 있으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뭐가 그리 구린지 자생적으로 피어난 그녀에 대한 일반인들의 추모 열기도 효과적으로 봉쇄하고 있습니다. 한 예로 그녀의 추모식을 위해 그녀의 묘지로 사람들이 몰린다는 정보가 있으면 공안들을 배치해 물리적인 방법으로 추모객을 막기보다 추모하는 이들의 영상을 찍는 식으로요. 영상으로 그들의 신원을 파악해 차후에 공안으로 부르거나 직장생활을 힘들게 하는 등의 불이익을 주는 것이죠. “힘없는 국민에게 국가만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추악한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이러니 어느 누가 남의 일에 나서겠습니까. 이렇게 살아왔으니 말이죠. 이런 그들의 모습은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어요.


얼마 전 사망한 리커창 전 총리의 애도를 위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 앞에 국화를 바쳤습니다. 석연찮은 그의 죽음은, 죽음을 둘러싼 많은 억측과 정부에 대한 불신을 불러왔고 이를 방증하듯 불과 이틀 만에 그의 집 앞엔 하얀 국화가 산처럼 쌓였습니다. 이에 놀란 중국 정부는 어느 날 갑자기 쌓였던 국화들을 모두 치워버렸죠. 추모를 위해 개인들이 놓아둔 국화를 아무런 권리도 없는 정부가 나서서 치워버린 겁니다. 일종의 경고였던 것이죠. 공산당은 리커창에 대한 추모를 원하지 않는다라는 메시지를 인민들에게 보냈던 겁니다. 그 후론 불이익을 두려워한 사람들이 더 이상 국화를 바치지 못하게 되었고요. 이게 중국공산당의 전형적인 제재방식입니다.


몇 년 전 사드 사태도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중국 내에서 한국의 문화와 경제 활동이 명백히 제한되고 있음에도 중국 정부는 지금껏 자신들은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순수하게 애도의 마음만으로 린자오의 묘를 찾았음에도 후에 정부 기관의 전화를 받는다면, 설령 협박이나 강압의 내용이 아닌 일상적인 통화였다고 해도 누가, 과연 누가 다시 그녀의 묘를 찾을 수 있을까요.




大山子

중국 예술가들의 용기있는 풍자는 가끔 나를 제대로 놀래키곤 한다.




이름만 그럴싸한, 실제로는 대학살극이나 다름없었던 문화대혁명 역시 비슷합니다. 마오의 문화대혁명은 그가 내세웠던 허울과는 상관없이 그저 자신의 독재에 해가 될 조금이라도 잘난 사람은 싹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홍위병이라며 어린 학생들을 앞세워 자신의 손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말이죠. 한 손에 마오의 어록집을 흔들며 전국에서 몰려든 수천의 어린 학생들을 무려 열 번이 넘게 접견까지 해놓고도, 관영 언론을 통해 그렇게나 자주 독려 메시지를 날렸음에도 “어? 걔네가 그랬어? 난 몰랐는데?”. 마오의 살아온 인생을 보면 그의 머리가 얼마나 비상한지 잘 알 수 있죠. 악한 사람이 똑똑하기까지 하면 얼마나 무서운 결과로 돌아오는지 잘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시작은 권력욕에서 비롯된 단순한 정치적 사건일 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론 국가적인 재앙이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중국인들 머릿속엔 “나서면 탈 난다.”라는 의식이 크게, 아주 크게 자라난 게 아닐까요. 거리에서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갈 때, 철모르는 청소년들이 당과 마오의 홍위병으로서 들떠 미쳐 날뛸 때, 사람들의 유일한 생명줄은 오로지 “모르쇠”였을 겁니다. 외면만이 그들의 목숨을 부지시켜줄 수 있었으니까요. 국가가 어떤 짓을 하든, 이웃들이 어떤 꼴을 당하든, 정의가 어떻고 인륜이 어떻든 그저 외면해야만 살 수 있던 시대를 살아냈으니 말입니다. 지금의 중국엔 아직도 그 시대의 그늘이 얼룩처럼 남아 있어요. 세상은 바뀌어도 마음 깊숙이 박혀버린 공포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니까요.




南锣鼓巷

나는 가끔 중국인들이 입력된 프로토콜을 열심히 수행하는 양철 로봇 같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물론 그러한 시대를 살지 않은 우리도 남의 일엔 무심합니다. 우리의 무관심은 중국인들의 그것과는 결이 다르긴 하죠. 이기심이랄까요. 그 기저엔 경쟁심도 한몫하고요. 어릴 때부터 남과 어울려 살아가는 법보다 경쟁하고 상대를 이겨야 하는 환경에서 자라왔으니까요. 우리에게 성공이란 대부분 남을 이겼을 때 찾아왔습니다. 그러니 남에게 관심을 가질 마음의 여유 따윈 없을 겁니다. 누구는 이를 개인의 문제만이 아닌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며 스스로를 정당화 시키곤 합니다. 내가 문제가 아니야~ 세상이 이런데 어쩌겠어~ 혹은 개인주의라는, 비교적 그럴싸하고 도덕적으로 조금은 나아 보이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죠. 경제가 발전할수록, 선진국일수록 자연스레 개인주의는 심화되는 것이라며 북유럽을 예로 들기도 합니다. 이유야 어떻든 뭐라 불리던 밥맛입니다. 그저 나만 잘살아보겠다는 의지의 소심한 표현방식일 뿐이니까요.

“저기, 저도 안 건드릴 테니까 그쪽도 조심해 주실래요?” 뭐 이런 식으로.

“나 살기도 바빠~“ ”내가 좋다는데 왜? 나만 좋으면 돼~“ ”니가 뭔 상관이고 어쩌라고~"


네. 좋네요. 그냥 이렇게 삽시다. 타클라마칸의 사막 도마뱀처럼 건조하게. 그게 뭐든 몸속의 모든 것들이 너무 메말라 당신이 죽어가도 어느 누구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없는 그런 세상.

좋네요. 쿨하고.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남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