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있는 삶
제 주위엔 노후에 초라해지지 않기 위해 진작부터 적금과 연금을 들어놓고, 악기를 배운다거나 세계여행처럼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들을 따뜻한 노년을 위해 꾹 참고 미루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건전한 대한민국 표준인(標準人)들이 있습니다. 물론 저는 그렇지 못한 대척점 인생의 전형으로서 저녁에 먹으려 사놓은 삼겹살을 아침부터 굽고 있는 비표준의 인생과 무대책의 인간형이라 할 수 있어요. 제가 참고 미루는 것이라면 돈 버는 모든 행위와 양치질, 다이어트 정도가 아닐까요. 아, 매달 내야 하는 공과금도 있네요.
北海公园
이른 아침 자금성 인근 공원에서 아침 제조 중인 북경인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시끄럽고 민폐까지 끼치는 광장무와 달리 일종의 기체조로 음악 없이 고요하고 느릿한 몸동작이 특징이다. 상대적으로 노인분들이 많이 하신다.
그리하다 보니 모두의 예상대로 저의 노년은 먹을 것도 없고 아파도 약도 못 사 먹는 가난한 늙은이가 되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돈 뜯길까 두려운 주변 사람들 간에 명동 한복판에 들어선 나병환자 마냥의 인간관계를 만들어 낼지 모르겠지만 뭐, 어쩔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대범하지도 못해 고민 없이 사는 것도 아니니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생인가 봅니다.
大钟寺
우다코로 향하는 13호선을 타고 가다 우연히 한가롭게 철도 변에 앉아있는 노인과 아이를 보고 다음 역에 내려 무려 이십여 분을 뛰었는데 다행히 그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을 촬영하던 나를 발견한 노인은 항의하는 대신 아이를 데리고 서둘러 일어섰다. 아마도 철도 변에 앉아있는 자신들이 부당하다 생각한 듯 한데, 난 도대체 뭔 짓을 한 걸까. 아직도 가끔 후회되곤 한다. 뭔 대단한 사진을 찍겠다고 그들의 오붓한 즐거움을 망쳐버린 것인가 말이다.
하지만 노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름만으로도 든든한 노후 자금에 있지만은 않을 겁니다. 사람인 것이죠. 가족이든 친구이든, 행복하고 싶은 사람의 인생엔 함께 부대끼며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함께 할 사람이 주위에 있어야 합니다.
炭儿胡同
점차 사라져가는 인민복 차림의 할머니들이 동네 구멍가게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계셨다.
북경의 거리를 걷다 보면 노인분들이 많이 보여요. 공원이나 동네 운동시설(거의 모든 주택가, 아파트촌에 빠짐없이 운동시설이 있다.) 등에 모여 앉아 이웃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장기나 카드놀이, 마작에 열중인 노인들은 북경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풍경입니다. 사람이 태어나 노인이 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니, 세상 어느 곳이라고 노인이 없을까마는 북경의 노인분들은 우리와 같은 단기 여행자들 눈에도 쉽고 흔하게 만날 수 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북경의 노인, 곧 경제 활동을 그만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집이 아닌 골목에, 광장에, 공원에, 장소를 불문하고 많이 나와 계시기 때문이죠. 노인이니까, 늙었으니까. 남의 시선에, 자식 눈치를 봐야 해서 자의 반 타의 반 집안에서 남은 세월을 흘려보내는 그런 노년의 삶은 적어도 북경에는 없습니다. 그런 우울한 노후가 북경에는 없어요.
后肖家胡同
점심시간을 이용해 식당 뒤 후통에서 칼춤을 연습하는 할아버지. 아마 조촐한 그들만의 공연이
있는 듯했다. 동작 순서가 적힌 종이를 들고 있던 아주머니는 경험이 많은지 할아버지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댔다.
그러니 북경에선 나이가 들어도 할 일도, 함께 놀 친구도 많습니다. 모두가 젊은이들 못지않게 활동적이니까요. 일단 집 밖을 나오면 함께 여가를 즐길 친구들이 얼마든지 있으니 더 자주 나오게 되는 것이죠. 집 안 보다 집 밖이 훨씬 재미있으니까요. 좋은 순환입니다.
拐棒胡同
낡은 사합원들이 헐리고 새롭게 단장된 동네는 예전에 없던 높은 시멘트벽이 생겼다. 할아버지 한 분이 친구를 찾아 골목을 걸어 나오고 계셨다.
간단히 공원이나 집 앞 의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거나 볕 바라기를 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원에선 노인들이 모여 우리네 해금처럼 생긴 얼후라는 전통악기를 합주하기도 하고, 큰 붓에 먹이 아닌 물을 묻혀 보도블록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서예를 하고, 동그랗게 모여 커다란 제기를 차거나 전통 무예를 즐기는 등 보다 활동적인 여가를 즐기는 노인들도 많이 계시죠. 혹시라도 같이할 사람이 없다면 스차하이에서 갖가지 모양의 연을 하늘 높이 날리는 겁니다. 덕분에 스차하이 인근 후통엔 수제 연을 만드는 공방이 여러 곳이 있어요. 우리 부모님들이 노년까지도 서른, 마흔이 넘은 자식들의 에프터서비스에 매달려 있을 때, 북경의 노인들은 이리도 한가롭고 즐겁게 노년을 보내는 겁니다.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어요.
地坛公园
개성 없이 크기만 엄청났던 북경의 어느 공원. 내게 북경의 공원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깨닫게 해줬던 곳이다. 호기롭게 입장했다가 꽤 오랜 시간 동안 나오는 출구를 찾지 못했다. 무척 추운 1월임에도 공원의 이곳저곳엔 산책을 즐기는 노인분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흔히 노년일수록 서울 같은 대도시가 좋고 이민을 가더라도 후진국보단 선진국이 좋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의료시설이나 편의시설 면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아무리 편한 시설과 좋은 약으로 수명만 연장하면 뭐 할까요. 노년일수록 바쁘고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선진국일수록 살기 외롭습니다. 미국을 보세요. 노인들을 위한 시설은 많지만 노인들은 그런 시설 속에 있습니다. 물론 전부가 그런 것도 아니고 의료 등 편의성 면에선 분명 좋은 부분이 있어요. 하지만 그게 뭔가요. 우리가 가족과 친구와 떨어져 그런 시설에 들어가고자 한평생을 살아낸 건 아니잖아요.
1. 후통에서는 어디든 노인들이 모여 장기를 두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2. 자금성 해자 변에 앉아 볕 바라기를 하시던 노인. 군인 출신이었는지 가슴에 훈장들을 자랑스럽게 달고 계 셨는데 연세를 보아 한국전에도 참전하셨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뭔가 음.....
노년일수록 외로움을 잘 느끼게 되고 그러다 보니 가족들과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기 좋아하는 것이 인지상정임에도 우리도 노년은 너무나 외롭습니다. 우리는 노인, 특히 할아버지들에 대해 과도한 이미지를 만들어 놓고 그리 행동해야 한다는 압박이 심하지 않나요. 할아버지들도 자식들 앞이건 어디서건 흥이 나면 노래도 부르고 심심하면 제기도 차고 지나가는 예쁜 아가씨를 흘낏거려도 되는 건데 말이죠.
"이봐 이쁜 아가씨~ 나 아직 힘이~"
"꺼져..,"
국이 짜면 짜다 말하고 용돈이 부족하면 더 달라고 말하고, 새 옷이 필요하면 며느리를 졸라서라도 사 입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아빠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니고, 아버님이라 불리는 입장에서의 행동거지는 좁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할아버지들이 종각이나 동묘에 모이는 겁니다. 그리고 동네에서, 집안에서 꾹꾹 참았던 터프함을 발산하는 것이죠. 슬프네요.
그놈의 처신이라는 것이 뭔지. 체통이라는 게 뭔지,
大安澜营胡同
인민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노인들이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기에 전념하셨다.
어찌 보면 어른, 처신, 체통 등의 단어들은 노인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젊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일종의 방호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젊은 사람과 어울리려 다가오는 노인들에게 “어르신!”, “아버님이 어째~” 뭐 이런 식의 결계(結界)를 쳐버리는 것이 아니냔 말이죠. 어르신이라는 호칭은 존중이나 대우가 아닌, 당신과 나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어요.
그러니 “제발 내 옆에 오지 마!”
뭐 이런 것 아니냔 말입니다.
西口袋胡同
후통을 걷다 우연히 한 할머니로부터 종이컵에 담긴 차 한 잔과 해바라기 씨를 얻어먹었다. 참 고우시던 할머니.
正阳门
너무나 보기 좋았던 노부부. 혹시 방해 될까봐 제대로 촬영을 못 해 아쉬웠다. 할아버지 손엔 작은 1회용 카메라가 들려 있었고 최선을 다해 할머니를 예쁘게 담으려 애를 쓰시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았다. 아름다웠다.
북경에서 만나는 노년의 분들은 멋이 있어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 계시니까요. 북경에서 가장 부러운 모습이고 배워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문화가 곧 돈이라지만 뭐든 경제적으로만 해석하려 들지 말고 돈 안 되는 문화라도 좋은 건 좀 수입을 했으면 합니다. 제가 나이를 먹으면 장기판과 커다란 재기를 허리춤에 차고 골목길에 숨어있어야겠어요. 딱지와 구슬, 팽이도 주머니에 넣고서. 그러다 골목을 지나는 또래를 발견하면 “친구야 놀자~” 하며 뒤뚱뒤뚱 달려 나가는 것이죠. 상대방의 깜짝 놀라는 반응은 그때 가서 고민하기로 하고. 일단은 나만 재밌으면 되니까 뭐...
1. 아직은 쌀쌀했던 2월이었지만 다정한 노부부는 집 앞 낡은 소파에 앉아 볕바라기를 하셨다.
2. 버려진 기찻길을 손을 잡고 다정히 걷는 노부부.
1. 카드놀이에 열중이신 마을 어른들. 분위기가 사뭇 진지했다.
2. 제법 큰 판돈이 걸렸던 게임을 잡은 아저씨가 환히 웃고 있다. 그들 둘러싼 분위기는 음...
1. 영하의 날씨였음에도 마을의 노인들은 볕이 잘 드는 담장에 모여 얼후 등 전통악기를 연주하셨다.
2. 스차하이 입구의 넓은 광장에서 멋쟁이 할아버지가 얼후를 연주 중이다.
1. 커다란 붓에 먹이 아닌 금방 말라버리는 물을 찍어 서예를 하는 노인.
2.3. 물을 찍은 붓으로 인도에 그림을 그리는 남성과 그림 속 여인을 빼닮은 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