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하필이면 왜 북경인가

백 만년만의 해외여행인데

by 신정훈


미국의 라스베이거스와 중국의 마카오는 공통점이 몇 개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과 전 재산을 탕진할 수 있는 가장 합법적인 장소라는 점 말고도 그 둘에게는 “신상”이 대접받는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이죠. 여기서 신상은 카지노를 말합니다. 카지노는 곧 커다란 호텔이고요. 어제까지 “돈 날리려면 여기로”라는 카지노가 가장 크고 화려한 곳이었다면, 오늘은 방금 개장한 “거지의 세상으로 달려가자! 잽싸게!”라는 카지노 앞이 북적입니다. 새로 생긴 곳들이 훨씬 더 크고 화려하고 뷔페 음식도 가장 기름진 법이니까요.


“너 새로 생긴 b 카지노 가봤어? 거기가 여기보다 32평쯤 더 넓고 트랜스 지방 함량도 39% 더 높다니까?”

“아! 정말?”

“그렇다니까? 더불어 빈털터리가 되기도 얼마나 쉽게 해 놨다구~”

“오! 어서 빨리 달려가 보세~”


그러니 여러분이 라스베이거스나 마카오 여행을 생각하신다면 좀 천천히 가셔도 되는 겁니다. 부지런을 떨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손해죠. 하지만 북경은 다릅니다. 만약 여러분이 북경의 관광지가 아닌 오래된 골목, 즉 후통을 걷고 계시다면 그 좁고 구불거리는 골목과의 조우는 그 순간이 마지막일지 모르거든요. 몇 년 뒤 여러분이 다시 북경을 찾아 그 골목을 찾을 때면 이미 과거의 골목은 사라지고 없을 테니까요. 아마 자금성만큼 커다랗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최신의 빌딩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겠죠. 아쉬운 마음에 그 자리에 우뚝 솟은 빌딩에게라도 말을 걸어 본다면 여러분은 중국 고유의 대화법을 경험하실 거예요.


“저 혹시... 여기에 구불리 후통이라고 있지 않았나요? 그 대단히 낡고 대단히 지저분했던...”

“우리 중국공산당은 인민을 위해 모든 건물을 최고로 크게! 자금성만 하게! 짓고 있습니다.”

“아니 그건 알겠는데~ 예전에 이 자리에 지저분하고 낡았지만 운치있던 골목이...”

“우리 중국공산당은 모든 건물을 최고로 크게! 자금성만 하게!! 짓고 있다니까요?”

“아니 그러니까~ 그건 알겠는데, 예전에 여기 골목이....”

“여기 골목 따윈 처음부터 없었음.”

“아니 분명 여기에...”

“대화 끝.”


물론 기껏 타국의 골목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한가? 하시는 분들도 많으실 거예요. 당연합니다.

내 소중한 시간과 돈을 들여 백만 년 만에 비행기에 몸을 실었는데 뭐? 골목? 골목을 보고 오라고? 하실 겁니다. 물론 안 되죠. 골목 따위로 여러분을 꼬실 수 없다는 거 잘 압니다.

저라도 안 갑니다.


“구릿빛 피부의 비키니 미녀 vs 경이로운 대자연 vs 곧 없어질 골목”의 3각 구도라면 어느 미친놈이, 아 죄송합니다. 품위 없이 일상용어가 튀어나왔네요. 제가 이렇습니다. 아무튼, “정상적인 뇌와 판단력을 가진 사람”중에 어느 누가 골목을 택할까요. 당연합니다. 북경의 골목 따윈 가지 마세요.


“제.발.비.키.니.미.녀.를.놔.두.고.그.런.짓.은.하.지.말.아.주.세.요.”


하지만, 없어지는 것이 단순히 골목만이 아니라면 이야기는 조금, 아니 조금보다는 좀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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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城区

야구모자가 너무 잘 어울리셨던 북경의 멋쟁이 할아버지.



골목은 사람이 이동하는 통로이자 문화가 전파되는 경로라고 합니다. 사람 다니는 길이라는 것은 쉽게 이해돼도 거창하게 문화의 경로라니요. 저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생각해 보세요. 골목을 걷는데 어디선가 맛난 삼겹살 굽는 냄새가 솔솔 풍겨오는 겁니다. 그러면 누구라도 먹고 싶을 것이고 없는 살림에 자기도 저녁 반찬으로 삼겹살을 굽게 됩니다. 어느 집인가 번쩍거리는 새 차를 골목에 세워 뒀다면 공부라면 몰라도 뽐내기라면 질 수 없다는 “내가 제일 잘 나가”씨 역시 새 차를 뽑게 되겠죠. 하루종일 상사에게 시달린 스트레스에 백주 한잔 걸치고 터벅터벅 동네 어귀에 접어드는데 골목 초입에 떡하니 “우리 아들 서울대 합격! 너 아들 바보ㅋㅋㅋ” 이라고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다면 치타의 속도로 집으로 달려가 게임기에 코를 박고 낄낄거리던 아들놈을 향해 등짝 스파이크를 날리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둘 전파가 되는 겁니다. 그게 유행이든 문화든 거시기한 그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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秀水西街

오래된 후통엔 아이들만큼이나 많은 노인들이 나와 여가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 외국인이 한국의 서울을 찾습니다. 그는 공항에서 얻은 관광 지도를 펼쳐 들고 남산타워와 인사동, 명동부터 달려갑니다. 3박 4일의 촉박한 일정에 쫓긴 그가 기껏 명동칼국수의 무한 리필 면 사리에 감동하고 한글 간판의 인사동 스타벅스에 앉아 한국만의 정취를 느끼며 한국 향(香)이 가미된 중국산 모조 기념품이나 사 들고 돌아간다면 여러분 기분은 어떠실까요. 친절한 얼굴의 택시 기사에게 정상가의 열 배가 넘는 택시비를 뜯기고 한 장에 이만 원이나 받는 포장마차의 빈대떡을 마주했다면 여러분들 마음은 어떠실 것 같습니까. 강남역을 오가는 똑같은 얼굴의 미녀들을 보며 “한국은 쌍둥이가 많아~” 라거나, 원색의 등산복 물결을 보며 “역시 산악국가 대한민국! 모두가 등산인~” 이라고 믿게 되거나, 태극기와 벌건 글자가 가득한 팻말을 들고 거리를 점거한 노인들의 시위 현장을 보며 “한국에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 투쟁이 시작된 것인가! 오, 어르신들이여~ 혁명의 붉은 깃발을 높게 드시구려~” 라며 짐짓 노동 운동가 풍의 지레짐작을 해버린다면 어떠실 것 같냐고요. 휴가 나온 한 무리의 군인들을 보고 “전쟁이다! 한국은 위험해! 전쟁이야!”라며 일정을 앞당겨 도망치듯 떠나버리면 기분이 어떠시겠냔 말입니다.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한국 관광 “참 잘했어요” 도장은 찍어 줄 수 없지 않을까요. 아마도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드실 겁니다.


여러분들이 애써 북경을 찾아 마오의 초상화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지루하기 그지없는 자금성을 의무감으로 힘들게 돌고, 도통 존재 이유를 알 수 없는 구시대적 “공산주의풍의 선전 거리” 왕푸징에서, 먹지도 못할 전갈 꼬치나 불쌍한 물방개 튀김과 기념사진 한 방 찍고 오실 거라면 북경 따위는 가지 마세요. 누군가 서울을 찾아 블로그 맛집도, 중국산 기념품도 아닌 진정한 서울을 머리와 가슴에 담아가길 바라신다면 역시 여러분들도 북경에선 그러시면 안 되는 겁니다.


북경의 골목은 좁고 구불거리며 지저분하거나 냄새도 나고 가끔은 지리에 서툰 여행자들이 길을 잃게도 합니다. 개똥도 밟을 수 있어요. 그러나 그런 보잘것없는 골목이 모여 동네를 이루고 곧 지역의 문화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니 골목은 여행지의 거짓 없는 솔직한 모습을, 오늘을 살아가는 현지인들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살필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북경의 골목인 후통은 최적의 여행지라 할 수 있어요. 원/명/청 시대의 유명한 유적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오히려 수백 년간 사람의 출입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이름만 거창한 유적지들 보다 보통의 사람들이 살아왔고 살아갈, 오랜 역사와 삶의 이야기들을 고스란히 품은 골목들이 훨씬 소중하지 않을까요. 그런 골목들이 북경엔 넘쳐납니다. 그저 사진 배경용인 죽은 유적지가 아니라 살아있는, 지금도 북경인들의 생활이 이어지는,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뛰어놀고, 아침마다 아침 장터가 열리고. 노인들이 모여 마작을 하거나 한가로이 볕 바라기를 하는 그런 진짜 골목 말이에요. 하지만 그런 골목들이 점점 사라져 간다면 여행자로선 장님이 코끼리 더듬듯 식상한 관광지만 뺑뺑 돌며 셀카봉 스킬만 사용하다 오게 될 수밖에요. 물론 얼짱 각도로.



东总布胡同

볕이 좋은 벽에 나란히 기대 선 남자들은 뜻밖에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쉽게도 북경도 그런 골목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치타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어요.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북경의 어느 작은 골목이 지도상에서 사라지고 있을 겁니다. 골목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골목을 오가며 살아왔던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 역사가 함께 사라짐을 의미하겠죠. 결국엔 그저 자금성과 다를 바 없는 관광용, 우리네 북촌 한옥마을과 다름없는 살아가기보다는 보여주기 위한 그런 동네와 골목만 남게 될 테고요. 분명 어떤 분들은 그걸 더 좋아하실지도 모르겠어요. 깨끗하고 관광지이니 사람이 많아 안전하다며. 하지만 북촌 한옥마을은 분명 서울의 모습 중 하나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북촌과 같은 한옥에서 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살고 있지 않아요. 대부분 아파트나 주택, 다세대 건물에 살았고 살고 있어요. 이것이 가까운 과거와 현재, 앞으로도 서울 사람들이 살아갈 솔직한 모습이 아닐까요. 한복이 아니라 청바지와 넥타이가 우리의 현재 모습이고 서울의 모습인 것처럼요. 북경도 언젠가는 이렇게 되겠죠.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복과 한옥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이자 문화의 중요한 아이콘이고 자랑스러운 유산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 삶의 모습이기도 하죠. 단지 그것은 그것대로,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의 지금 모습도 그만큼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은 압도적으로 김치지만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선호하는 한국 음식은 역사도 짧은 삼겹살, 치킨인 것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그들에게 삼겹살, 치킨은 김치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이에요.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신선로가 아무리 근사하고 구절판이 아무리 이뻐도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은 치킨과 삼겹살, 자장면이니까요. 음식의 역사가 어찌 되었든 어디에서 유래가 되었던 모두가 소중한 우리의 음식이고 문화라는 이야기는 다른 분야에서도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 줍니다.


다행히 아직 북경엔 한옥도 한복도 있습니다.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닌 실생활로서 당당하게 존재하고 있어요. 현대화된 거대한 대도시로서는 드물게 과거와 현재가 여전히 공존하고 있습니다. 한복을 입은 아저씨와 짧은 치마의 아가씨가, 댕기 머리 꼬마와 스냅백을 돌려쓴 아이들이, 갓 쓴 노인과 모히칸 머리의 청년이 한옥과 아파트, 초가집, 고급빌라, 슬레이트 지붕의 판잣집에서 걸어 나와 전차를 타고, 자전거를 타고, 벤츠를 타고, 페라리 12기통의 카랑 거리는 비명을 내지르며, 보온병에 담긴 녹차를, 스타벅스 아메리카노를, 발렌시아산 오렌지 주스를 홀짝거리며 이질감 없이 어울려 후통을 거닐고 있어요. 그들은 흡사 택견의 어기적거리는 발사위처럼 이질적이지만 그 무엇보다 조화롭게 오늘날 북경의 모습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달라지고 있어요. 변화와 개선, 효율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낡음이라는 한 축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낡음은 비단 후진의 의미만이 아니라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낡음은 때때로 전통, 문화, 역사, 그리고 누군가의 향수를 의미하기도 하니까요. 아쉽게도 북경 역시 효율과 현대화라는 기치(旗幟)하에 점점 함축된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우리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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钟库胡同

이제는 중국에서도 보기 힘든 전족을 하신 할머니. 전족이라니. 연세가 얼마나 되실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불편한 작은 발로 인생 대부분을 걸어 오셨겠지만 여전히 걸음이 불안해 보였다.




“흥! 그런다고 내 소중한 돈과 시간을 북경, 그것도 기껏 골목 따위에 투자할 거 같아?”하시는 분들도 여전히 계시겠지요. 이해하고 존중합니다. 하지만 분명 아쉽고 안타깝고 조바심이 나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더 이상 이곳엔 없는 노스텔지아적 삶의 모습, 혹은 가물거리는 추억의 조각들을 이곳이 아닌 저곳에서, 비록 타국에서라도 찾을 수 있다면, 더구나 그런 곳을 최소한의 비용과 약간의 수고를 통해 찾아갈 수가 있다면,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보고 만지고 맛보고 가슴으로 느껴볼 수 있다면 언제나 설레는 마음으로 북경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여행의 이유로 충분하고 북경을 사랑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저처럼 말이에요. 북경소풍은 그런 분들을 위해 쓰여지고 있습니다. 관광지와 유적지 위주의 판에 박히고 뻔한 홍보성 여행기가 아니라 여행지로서의 북경과 북경사람들에게 편견 없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픈 분들 말입니다.


자, 이제 북경과 북경의 구불거리는 골목과 그 골목에서 살아가는 북경인들, 그들의 이야기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아봅시다. 아직 책을 집어던지지 않으셨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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