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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정윤 Apr 28. 2023

나만의 광산에 들어간 사람들

디깅 모멘텀 (상)

“아이돌그룹 A의 생카에 가고 싶어요! 대학로나 대학로에서 가장 가까운 생카는 어디일까요?”


“아이돌그룹 B의 생카가 서울에 많이 열리고 있는데, 대학로에서는 대부분 1시간 걸리네요! 아래를 참고해 주세요.”

(첨부자료에는 '카페·꽃집·네컷' 등의 분류, 기간, 지역, 주소, 기본 특전, 선착 특전이 엑셀파일로 정리됨)



온라인에 올라온 윗글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들의 세계를 모르는 ‘머글’이다. 머글이란 소설 『해리 포터』에서 마법세계의 존재를 모르는 보통 사람을 일컫는 말로 등장했는데, 지금은 특정 분야에 빠진 사람들이 그들의 세계를 모르는 일반인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한다.


요즘 아이돌 덕질의 세계를 모르는 머글을 위해 설명하자면, 질문자가 물어본 ‘생카’는 ‘생일카페’의 줄임말이다. 좋아하는 아이돌이 생일을 맞으면 팬들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카페공간을 마련한다. 대체로 생일 전후 2~3일간 카페나 꽃집, 즉석사진관(‘네컷’-'인생네컷'을 의미)을 대관해 해당 아이돌의 사진으로 꾸미고 찾아오는 팬들을 위한 사은품(특전)을 준비한다. 놀라운 점은 생카에 그 아이돌이 찾아오는 게 아니며, 생카를 열기 위해 소요되는 돈·시간·노력 비용은 모두 팬들이 직접 부담한다는 것이다.




사실 연예인 (혹은 아이돌) 덕질은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좋아하는 아이돌의 앨범을 사 모으고, 아이돌 사진이 들어간 굿즈와 시시콜콜한 정보까지 수집하는 팬들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그런데 생카 문화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요즘 덕질은 여러모로 과거와 다르다. 좋아하는 대상을 추종하거나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갖고 싶은 굿즈를 주문 제작하며 다른 팬들과의 교류의 장도 마련한다.


아이돌이나 문화 콘텐츠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덕질 2.0 시대, 요즘 소비자들이 특정 소비 영역에 몰두하는 현상은 ‘디깅(digging)’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디깅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행복으로 나아가는 ‘모멘텀(momentum, 추진력·동력)’이 되고 있다.

 



먼저 덕질과 디깅이란 단어에 미묘한 뉘앙스 차이가 있다. 덕질이란 말은 대중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됐지만 본래 일본의 ‘오타쿠’에서 나왔다. 특정 대중문화 콘텐츠에 심취해 사회적 관계를 끊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였던 오타쿠가 한국에서는 마니아를 다소 귀엽게 칭하는 말로 ‘덕후’가 됐고, 덕질이란 덕후로서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는 행동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질’이라는 접미사가 나타내는 것처럼 무언가에 과몰입하는 사람이란 다소 정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났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반면 디깅은 음악인들 사이에서 사용되던 말이다. ‘땅을 판다(dig)’라는 말처럼 수많은 음원 속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내려 파헤치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면 쉽다. 이제 디깅은 음악만이 아니라 온갖 분야에서 드러나지 않은 가치를 찾는 것으로 확대되고 있다. 디깅을 정의하자면, '내적 동기에 의해 하나의 좁은 영역이나 대상을 대중적이지 않은 부분으로 파고드는 것'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최근 디깅러들의 모습을 ‘깊이’ ‘넓이’ ‘높이’라는 3가지 키워드로 정리해 보려 한다. 깊이는 아주 좁은 하나의 대상이나 영역을 깊게 파고드는 것을 말하고, 넓이는 디깅을 통해 넓은 관계 맺기가 생겨나는 것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높이는 디깅의 심도가 깊어질수록 그들의 지위와 행복감은 높아진다는 것을 비유한다.




먼저 ‘깊이’를 추구하는 디깅의 모습은 딱 하나의 품목만 취급하는 상점이 늘어나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서울 연남동에 있는 ‘흑심’이라는 가게는 연필 전문점이다. 연필은 원래 진한 정도(B)와 단단한 정도(H)에 따라 종류를 수십 가지로 만들 수 있다. 종류만 다양한 것이 아니라, 이 가게에 들여오는 연필은 원산지도 가지각색이고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한정 수량 제품도 많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정말 원하는 연필을 구하기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연필 디깅러인 것이다. 


‘종이잡지클럽’은 지금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 종이로 출판된 잡지만 모아 놓은 독특한 공간이다. 물리적 공간은 크지 않지만 해외 잡지를 포함해 일반 서점에서 볼 수 없는 희귀한 주제의 잡지가 가득하다. 이용권을 구매해 도서관처럼 보고 갈 수도 있고, 소장하고 싶은 것은 구매해 갈 수도 있다. 종이잡지라는 테마도 독특하지만 잡지라는 매체 특성상 하나의 주제를 깊게 다룬 것이 많아 새로운 디깅거리를 찾는 이들에게도 흥미를 끌 만한 곳이다. 


먹는 것에 관심이 높아진 지금, 식문화는 대표적인 디깅 영역이 됐다. 서울 성수동에 있는 ‘버터 팬트리’는 버터만 취급한다. 요리의 완성 단계에 더해 풍미를 더하는 버터를 ‘피니싱 버터’라고 부르는데 해조류를 넣은 ‘해초버터’, 백명란젓을 넣은 ‘명란버터’, 캐러멜을 입힌 피칸의 식감이 살아 있는 ‘캐러멜 피칸 버터’ 등 다양한 피니싱 버터를 만들어 판매하는 곳이다. 이외에도 수제 치즈만을 판매하는 ‘치즈플로’라는 치즈 전문점도 있다.


대중적으로 사랑받던 메뉴가 전문가가 되어버린 소비자들을 위해 고급화, 세분화되는 현상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커피는 원두의 생산농장이라던가 향미에서 차별화 하는 스페셜티 커피로 시장이 형성되었고, 와인의 경우에도 독특한 향미가 살아 있는 내추럴 와인이 부상하고 있다. 최근에는 위스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하이볼을 주문할 때 어떤 위스키를 사용할지 취향껏 선택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도 시장이 성장하고 있다는 신호일 것이다.


이렇게 깊이 파고드는 디깅형 소비는 대상이 무엇인지도 중요하겠으나, 사실 파고드는 행위(디깅) 자체로부터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무엇이든 디깅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디깅러는 하나의 영역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분야를 동시다발적으로 디깅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본 내용은 필자가 국방일보에서 연재하는  <병영에서 만나는 트렌드>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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