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깅 모멘텀 (하)
수험생이나 취업준비생 등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굉장히 유명해진 영상이 있다. 일명 ‘호그와트 ASMR’. 이 영상은 판타지 소설 『해리포터』에 나오는 여러 장소를 배경으로 하되 ‘그레이트홀에서 자습하기’ ‘그리핀도르 기숙사에서 시험공부 하기’ 등 아주 디테일한 콘셉트로 제작된 시리즈물이다.
예를 들어 그레이트홀 영상은 연회장이라는 콘셉트답게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리고, 그리핀도르 기숙사 영상의 경우에는 기숙사의 조용한 새벽 감성을 살리는 식이다. 학생들은 이러한 콘셉트 영상을 틀어놓고 자신이 호그와트 학생이라는 상상을 하며 공부한다. 이를 ‘콘셉트 공부법’이라 부르는데 콘셉트에 몰입하는 만큼 공부에도 집중이 잘 된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이 단순히 영상을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댓글을 통해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번 마법약 시험 범위 실화냐’ ‘래번클로 기숙사 이름에 먹칠하지 말자’는 등 콘셉트에 진심인 사람들이 댓글을 통해 콘셉트놀이를 주고받는다. 익명의 온라인 공간이기에 가능한 이러한 상호작용은 참여하는 디깅러(Digginger·디깅하는 사람)들의 과몰입을 도와준다.
* 디깅(Digging)은 본인이 선호하는 분야에 깊게 파고드는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콘셉트 놀이 현상은 지난 글에 이어서 이야기하려는 디깅의 두 번째 특성과 관련이 깊다. 디깅을 매개로 관계가 넓게 확장된다는 점이다. 한 가지에 깊이 파고들다 보면 나와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을 찾고, 이들과 교류하는 재미가 중요해진다. 지난번 서두에서 설명한 ‘생카(생일 카페) 투어’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생일 카페에 가서 혼자 조용히 음료를 마시고 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온라인에서 교류하던 덕질 친구와 실제로 만나고 디깅의 기쁨을 서로 나누기 위해 카페를 찾는 사람들도 많다. 이렇게 디깅으로 맺어진 사람들은 함께 좋아하는 아이돌이 다녀간 음식점이나 촬영장 등 주요 명소를 탐방하는 ‘덕후투어’를 즐기기도 한다.
나아가 디깅러들의 상호작용은 시장을 뒤흔들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페이크 드라마’ ‘페이크 예능’의 인기가 그 위대함을 보여준다. 이름 그대로 페이크 드라마, 페이크 예능은 실제로 방영됐던 것은 아니지만 진짜처럼 잘 만든 가상의 드라마와 예능 영상이다. 특정 배우를 좋아하는 열혈 팬이 유튜브와 같은 영상 플랫폼에서 그 배우의 출연 장면만을 모아 제작한 2차 창작물이 다시 다른 팬들을 불러 모으는 역할을 하면서 최근에는 방송사에서 직접 2차 창작물을 선보이고 있다. 페이크 예능 ‘환승세포’는 예능프로그램 ‘환승연애’와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을 조합해 만든 것인데 두 프로그램을 좋아했던 시청자들에게 큰 재미를 선사했다.
한편, 특정 콘텐츠에 과몰입하는 디깅 행동이 누군가에는 현실도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디깅러는 ‘높이’라는 세 번째 단계로 나아간다. 디깅을 통해 성취감을 얻고 그 영역에서 지위를 인정받는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컬렉션을 자랑할 수 있는 전시장 역할을 하면서 특히 수집형 디깅은 과시와 인정의 대상이 됐다.
예를 들어 틱톡에서는 ‘#컬렉터체크(#collectorcheck)’라는 해시태그를 붙여 자신의 컬렉션을 소개하는 영상이 6만6000개가 넘는다. 수집한 품목은 가지각색이다. 텀블러, 라이터, 인형, 루빅스큐브(3·3·3개의 정육면체로 만들어진 퍼즐)도 있다. 컬렉터들은 자신의 컬렉션에서 가장 비싼 것, 가장 저렴한 것, 가장 좋아하는 것 등 정해진 순서에 따라 소장품을 소개한다.
물건만 수집하는 것이 아니다. 사진으로 남길 수 있는 경험도 훌륭한 수집 대상이다. 인스타그램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맛집 리뷰가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단순히 방문 사진을 올리는 것을 넘어서서, 라멘(일본식 라면)만 다루거나 전국의 숨은 김밥 맛집만 포스팅하는 등 특화가 이뤄지고 있다.
인플루언서 ‘콜린비’는 자신이 수집한 외식경험을 나름의 방식으로 편집해 ‘만원의 행복’ ‘2022 콜린비 리스트 서울편’ 등 미식 가이드로 유명해졌다. 해당업계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개인 소비자의 디깅이 대중에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이다.
이처럼 디깅이 모멘텀을 갖게 된 배경에는 기술이 기여한 바가 크다. 전 세계에서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찾을 수 있는 연결의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방 안에 앉아서도 전 세계 정보를 모을 수 있고 원한다면 바다 건너의 상품을 주문할 수도 있다.
기술의 발전이 디깅을 어렵게 하는 이유를 제거해준다면, 디깅을 하도록 부추기는 사회적 이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평생직장이 사라지고 학연·지연·혈연·종교 등이 약화되면서 '소속'이 우리에게 부여했던 정체성도 불안해졌다. 사람들은 이제 남과 다른, 자신의 색깔로 정체성을 확립하고 확인받는 것이 필요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넘쳐나는 상품과 콘텐츠 속에서 나만의 것을 찾아 디깅을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은 디깅을 고려해 브랜드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수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떠도는 소비자들에게 정착해서 디깅을 할 이유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브랜드의 역사를 스토리로 풀어내거나, 신생 브랜드의 경우라면 브랜드의 세계관을 구축하는 것이 방법이 될 수 있다. 최근 상품과 서비스를 홍보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 자체를 알리는 브랜드 다큐멘터리와 같은 콘텐츠가 만들어지는 것도 디깅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개인 소비자들도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사람들은 흔히 좋아하는 것에 굉장히 관대한 기준을 적용해 지출하는 경향이 있다. 디깅이 곧 과도한 소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만의 지침을 세워보는 것도 필요하다.
물론 디깅은 심리적으로 이로운 측면도 있다. 애정을 쏟을 대상이 있다는 것은 생활에 큰 활력을 불어넣고 다른 일에서 어려움에 직면하더라도 버틸 수 있는 힘이 돼준다. 모두가 적절한 디깅으로 행복의 균형점을 찾을 때 소비자와 시장 모두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