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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정윤 Nov 05. 2023

요즘 '본방사수'를 안하게 된 이유

트렌드 코리아 2024 (1) 분초사회

‘하루 3%의 시간으로 인생을 바꿔보세요’



길을 걷다가 한 광고 문구가 눈에 띄었다. 

24시간의 3%, 즉 하루 45분의 운동이면 자기관리를 할 수 있다는 피트니스 클럽의 광고였다. 이제까지 익숙했던 피트니스의 광고는 ‘월 0000원이면 몸짱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식으로 금전적 비용을 강조하는 것이었지만, 이 광고는 시간이 크게 소요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 인상적이다. 이 광고가 보여주듯 시간은 이제 돈과 동일하게,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한 자원이 되고 있다.



‘분초를 다투며 산다’는 말은 요즘 사람들에게 단순한 관용어에 그치지 않는다. 배달 음식을 주문하면 우리 집 문 앞에 도달하기까지 몇 분 남았는지 실시간 확인이 가능하다. 분(分)뿐만 아니라 초(秒) 단위도 중요하다. 전 국민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앱 중 하나인 유튜브에서 사람들은 원하는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는 ‘타임스탬프’ 기능을 자주 활용한다. 영상 길이가 5분, 10분으로 길지 않음에도 초 단위로 지정할 수 있는 타임스탬프 덕에 시청자들은 1초도 낭비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가성비만큼이나 ‘시성비(시간 대비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필자가 함께하고 있는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시간을 중심으로 삶이 재편되는 사회 변화를 ‘분초사회’라는 트렌드로 명명했다. 시성비를 중시하는 분초사회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시간을 활용하는지 그 변화를 살펴보자.




첫째 시간을 압축적으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영상 콘텐츠를 시청할 때는 빨리감기를 해 시청하는 ‘배속시청’을 하는 것이 다반사이다. LG유플러스에 따르면 자사 VOD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 열 명 중 네 명(39%)이 표준 속도보다 빠른 배속으로 영상을 시청한다고 한다. 심지어 열 명 중 세 명(29%)은 2배속 이상으로 시청했다. 배속 시청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한국어로 제작된 드라마·영화를 보면서도 한국어 자막을 켜놓고 보는 사람이 많아졌다. 텍스트로 내용을 읽는 것이 듣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내용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중첩해서 사용하는 행동도 자주 관찰된다. 카페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노트북으로 주 작업을 하면서 옆에는 스마트폰과 태블릿을 거치해 놓고 N개의 스크린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SNS 계정을 여러 개 운영하는 경우에는 두 대 이상의 스마트폰을 동시에 올려놓고 사용하는 것도 종종 눈에 띈다. 이러한 소비자들의 이용 행태 변화에 따라 지난여름 출시된 삼성전자의 ‘갤럭시Z 폴드5’는 멀티 태스킹 지원 기능을 강화했다. 메인 스크린 하단에 자리한 태스크 바에서 바로 실행할 수 있는 ‘최근 사용 앱’의 개수를 2개에서 최대 4개까지 사용할 수 있도록 늘린 것이다.



세 번째로는 실패를 회피하는 성향이 강해지고 있다. 시성비가 낮은 경험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미리 정보탐색을 강화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최근 ‘본방사수’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없게 된 것은 시리즈가 완결될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중도하차’하지 않고 끝까지 볼 만한 가치가 있는지, 결말이 자신의 취향에 부합하는지를 확인한 뒤 시청 여부를 결정한다. 

실제로 CJ CGV가 관객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코로나 이전인 2019년에는 관객들이 영화가 개봉된 후 관람하러 극장을 찾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평균 10.9일이었지만 최근 1년 사이에는 개봉 후 관람까지 걸리는 기간이 15.1일로 4.3일 늘어났다고 한다. 새 영화가 개봉하면 바로 극장을 찾지 않고 영화 리뷰 전문 유튜버나 다른 관객들의 평점을 확인한 후에 관람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양상은 시간을 자신에게 맞추어 편집하는 것이다. 과거 정형화되어 있던 ‘9 to 6’이라는 업무 시간이 최근에는 유연하게 변하고 있다. 올빼미족을 위해 오후에 출근해 밤까지 근무할 수 있도록 자율 출퇴근제를 시행하는 회사가 있는가 하면, 근로자에게 주어지는 연차를 더욱 유연하게 쓸 수 있도록 1시간 단위로 휴가를 신청하는 ‘반반반차’제도까지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처럼 시간을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 여기는 분초사회를 살게 됐을까? 

분초사회의 도래는 우리 경제의 패러다임이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는 것이 중요한 재화 중심의 소유 경제였다. 반면 최근에는 좋은 물건보다 외식·공연·여행 등 경험 소비를 더욱 중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소유 경제에서는 시간을 희생하여 소득을 확보하는 것이 더 많이 소유할 수 있는 길이었지만 경험 경제에서는 돈뿐만 아니라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시간은 금전 자원과 달리 저축도 차용도 불가능한 한정된 자원이다. 볼거리·놀거리·먹을거리 등 경험할 거리가 풍부해질수록 하나의 경험을 선택함으로써 포기하게 되는 것도 급증한다. 시간당 가치가 커지는 것이다. 더욱이 시성비는 주관적인 만족감에 그치지 않는다. 업무의 효율성을 높여주는 디지털·AI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실제 성과의 차이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제 시간과 경험의 관점에서 우리 생활을 돌아볼 필요가 생겼다. 예를 들어, 조직 생활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필요한 것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조직 생활을 통해 얻는 보수나 명예 등 결과물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출퇴근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일과 시간 동안 매일 어떤 경험을 하는지가 만족도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이 때문에 요즘 조직의 고민은 ‘어떻게 구성원들의 경험을 관리하느냐’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분초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이라면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시간의 효율을 추구하는 나머지 경험의 질이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사실 멀티 태스킹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가 분초를 쪼개 쓸수록 오히려 잦은 주의 전환으로 인해 뇌의 효율은 떨어진다. 시간을 압축·중첩·편집하는 성향이 강해질수록 역설적으로 한 가지 일에 깊이 몰입하고 오래 집중할 수 있는 능력, 시간의 질을 관리하는 능력이 가장 중요한 능력이 될지도 모른다.





본 내용은 필자가 국방일보에서 연재하는  <병영에서 만나는 트렌드>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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