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낭만이라는 이름의 착취

by 배윤성

"야, 김 작가. 너 기억나냐? 오감독님 <발레리노> 찍을 때."
소주병이 네 병째 비워질 무렵, 남 대표의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처럼 붉어졌다. 본격적인 '라떼 토크'의 시동이 걸린 것이다.
"그때 오 감독님이 주연 배우 뺨 때리는 씬에서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김 작가가 빈 잔을 탁 내려놓으며 피식 웃었다.
"알지. '야, 가짜로 때리면 관객들이 다 알아! 진짜로 갈겨!'" "그래! 그래서 그 톱스타 A군이 신인 배우 뺨을 풀스윙으로 날렸잖아. '짝!' 소리가 조명기 터지는 소리보다 컸어. 그게 리얼리티지. 요즘 애들은 알아? 프롬프트 창에다가 '타격감' 입력하면 AI가 알아서 효과음 넣어주는 세상이잖아. 그게 무슨 연기야? 데이터 쪼가리지."
남 대표가 혀를 쯧쯧 차며 말을 이었다.
"그때 내가 그 신인 배우 달래주려고 회식비로만 오백만 원 긁었어. 법인카드로 청담동 횟집을 통째로 빌렸다고. 그때 내 지갑엔 한도가 없었어. 내가 사인 한 번 하면, 마포대교도 막았어! 알아?"
남 대표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장례식장 구석에 앉아 있던 조문객 몇 명이 힐끔거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2018년 <서울의 밤> 추격 씬! 내가 서울시청, 마포구청 졸라 쫓아 다니면서 허가 받아냈잖아. 월드컵 경기장 왕복 8차선 다 막고 포르쉐 세 대 때려 부쉈어. 헬기 띄우고! 지금 같으면 CG로 3초면 만드는 걸, 그땐 진짜 돈 태우고 기름 태워서 찍었다고!"
그는 흥분해서 침을 튀겼다.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 그의 눈빛만큼은 진드기 청소기가 아니라, 메가폰을 잡은 장군 같았다.
"형, 진정해. 지금은 상암동은 커녕, 형네 집 변기도 못 막잖아."
내 말에 김 작가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남 대표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야! 내가 못 막는 게 아냐. 안 막는 거야! 내 가슴 속엔 아직도 그 포르쉐 박살나던 장면이..."
"대표님. 팩트는 좀 똑바로 말씀하셔야죠."
그때였다. 옆 테이블, 칸막이 너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우리 셋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향했다. 그곳엔 말끔한 세미 정장에 최신형 스마트 워치, 그리고 테이블 위엔 '스크리너스 숏폼 어워드' 트로피가 놓여 있는 30대 남자들이 앉아 있었다. 딱 봐도 요즘 잘나가는 '크리에이터' 무리였다.
그중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 대표를 쳐다봤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 얼굴.
"누구... 세요?"
남 대표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물었다. 남자는 피식, 비소(誹笑)를 흘렸다.
"역시 기억 못 하시네. 하긴, 대표님 눈에 저희 같은 '소모품'들이 들어왔겠습니까."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끈한 수트 핏. 성공한 사업가의 태가 났다.
"저 <서울의 밤> 제작부 막내였던 최준호입니다. 대표님이 8차선 대로를 다 막았다고요? 에이, 거짓말은. 그거 막으려고 저희 제작부들 3일 밤새우면서 서울시청 마포구청 경찰서 뛰어 다니면서 빌고 또 빌었잖아요. 대표님은 그때 사우나 가 계셨고."
남 대표의 입이 떡 벌어졌다. 최준호... 최준호... 그제야 희미한 기억이 스치는 듯했다. 현장에서 슬레이트를 치고, 김밥을 나르던 수많은 '막내' 중 한 명.
"아... 준호? 야, 반갑다! 야.. 너 잘됐나보다? 지금은 뭐 하고 지내? 요즘에도 웹드라마 같은 거 찍고 다니냐?"
남 대표가 반가운 척 억지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지만, 최준호는 그 손을 무시했다.
"웹드라마가 아니라, '숏 다운' 제작사 대표입니다. 지난달에 스크리너스 조회수 1억 뷰 찍었고요."
1억 뷰라고? 우리 셋은 침을 꿀꺽 삼켰다. 1억 뷰면 광고 수익만 수억 원이다.
"대표님, 그리고 박 감독님."
최준호의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왔다. 경멸이 담긴 눈빛이었다.
"아까 낭만 운운하시던데, 그거 낭만 아닙니다. 폭력이고 갑질이죠. 그 뺨 맞은 신인 배우, 고막 터져서 병원 갔어요. 회식비 오백만 원? 저희한테는 '열정 페이' 강요하면서 룸살롱에서 법인카드 긁어 대는 거, 그게 낭만입니까?"
"이 자식이, 말이 좀 심하네? 마! 다 너희 잘 되라고 가르친 거야! 우리 바닥이 원래..."
내가 발끈해서 소리치자, 최준호 옆에 있던 다른 청년이 비아냥거렸다.
"원래 그런 바닥이라 망한 거예요. 비효율적이고, 꼰대 같고, 사람 갈아 넣어서 유지되던 시스템. 그거 AI가 대체해주니까 얼마나 좋아요? 우린 스태프 밤 안 새우게 해요. 월급도 제때 주고."
"......"
할 말이 없었다. 팩트였다. 그들의 눈에 우리는 낭만적인 예술가가 아니었다. 그저 시대를 착취하다가 도태된, 구질구질한 '산업 폐기물'일 뿐이었다.
"구차하게 옛날얘기 그만하시고 조용히 술이나 드시다 가세요. 아날로그 감성 팔이 듣기 역겨우니까."
최준호가 쐐기를 박고는 다시 자리에 앉으려 했다.
그 순간, 남 대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퓨즈가 끊어졌다. 수치심. 후배 앞에서, 그것도 한참 아래라고 생각했던 막내 앞에서 발가벗겨진 듯한 수치심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야 이, 예의라고는 밥말아 먹은 새끼들아!"
남 대표가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콰당'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의 손이 본능적으로 옆에 있던 '무기'를 잡았다.
우우웅-!
어이없게도, 그가 집어 든 건 소주병이 아니라 거대한 진드기 흡입기였다. 전원 스위치가 켜지며 모터가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니들이 영화를 알아? 클릭질 몇 번으로 만든 게 영화야? 어?!"
남 대표가 흡입기 노즐을 최준호의 얼굴에 겨누었다. 마치 총구처럼.
"어, 어? 뭐 하시는 거예요!" "다 빨아버릴 거야. 이놈들! 니들의 그 가벼운 1억 뷰도, 싸가지도! 싹 다!"
장례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시대의 마지막 꼰대들이, 디지털 신인류를 향해 진공청소기를 들이대는 기괴한 전쟁의 서막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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