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억... 헉... 야, 섰어? 안 쫓아오지?"
장례식장 뒷골목을 빠져나와 한참을 달린 뒤에야 우리는 멈춰 섰다. 폐점한 상가 건물의 어두운 계단. 쉰이 넘은 아저씨 셋이 헐떡거리는 소리가 골목을 채웠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니, 쪽팔려서 터질 것 같았다.
"아이고, 내 무릎이야... 이제 도망도 못 가겠다."
김 작가가 깨진 안경을 손으로 고쳐 쓰며 주저앉았다. 나도 벽에 기대어 가쁜 숨을 골랐다. 육개장 국물이 말라붙은 재킷에서 쉰내가 났다.
그런데, 남 대표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가 허공을 더듬듯 자신의 등 뒤를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사색이 된 얼굴로.
"어? 어...?"
"왜 그래? 어디 다쳤어?"
"없어..." "뭐가?"
"청소기... 내 청소기!"
남 대표의 비명 같은 소리에 우리는 멍해졌다. 아까 도망칠 때, 너무 정신줄 놓고 뛰느라 미처 청소기를 못 챙겼던 것이었다.
"아, 형. 그거 그냥 둬. 지금 가지러 가면 경찰한테 잡혀. 나중에 잠잠해지면 찾으러 가자."
"안 돼! 그거 잃어버리면 나 죽어!"
남 대표가 울상이 돼서 발을 동동 굴렀다.
"야, 그거 렌탈이야! 회사 자산이라고! 고유 번호 등록돼 있어서 잃어버리면 월급에서 까는 게 아니라 변상해야 돼! 300만 원이야, 300만 원!" "......" "그리고 뭐냐. 거.. 큐알코드! 경찰이 그거 조회해서 내 정보 알아내는 건 시간 문제야. 나 전과자 되면 회사 짤려! 그럼 우리 애들 학원비는 또 어떡하고!"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다 빨아버리겠다"며 기세등등하게 난동을 부리던 충무로의 호랑이는 온데 간데 없었다. 고작 회사 비품 하나에 목숨을 걸고, 짤릴까 봐 전전긍긍하는 '비정규직 가장'만이 거기에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찌질해서, 그리고 너무나 내 모습 같아서... 나는 화도 낼 수도 없었다.
"하아... 형. 진정해. 일단 경찰 갔는지 보고, 내가 가서 찾아올게. 형은 여기 있어."
"진짜지? 찬혁아, 너만 믿는다. 조심해야 돼. 기스 나면 안 돼."
우리는 근처 편의점 앞 플라스틱 테이블에 힘없이 둘러앉았다. 편의점에서 사가지고 온 시원한 캔맥주를 깠다.
"건배는 하지 말자. 쪽팔리니까."
김 작가의 말에 우리는 말없이 캔을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탄산이 따가웠다.
"야... 우리 진짜 왜 이러고 사냐."
남 대표가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왕년엔 마포대교도 막았는데... 지금은 청소기 하나 잃어버렸다고 벌벌 떨고. 진짜 인생... 너무 구질구질하지 않냐?"
"그러게. 나잇살 처먹고 쌈박질이나 하고."
"나 진짜 이렇게 살다 죽으면... 눈 못 감을 것 같다. 너무 억울해서."
남 대표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술기운 때문인지, 서러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침묵이 흘렀다. 편의점 라디오에서 나오는 흘러간 옛날 가요가 우리 주변을 공허하게 맴돌았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내일이 되면 남 대표는 다시 진드기를 잡으러 갈 것이고, 김 작가는 감정 없는 댓글을 달러 갈 것이고, 나는 오토바이를 탈 것이다. 변하는 건 없다. 그게 현실이니까.
"가자. 가서 청소기 찾아야지."
내가 빈 캔을 구기며 일어선 순간이었다.
치직- 치지직-
건너편, 낡은 5층 상가 건물 옥상에 있는 전광판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켜졌다. 평소엔 임플란트 광고나 나오던 촌스러운 전광판이었다.
[당신의 인생은 편집되지 않았습니다.]
투박한 고딕체 자막이 떴다. 화려한 홀로그램도, 웅장한 효과음도 없었다. 그저 뉴스 속보 같은 건조한 톤이었다.
[제1회 ‘The Man Of Screeners’ 공모전 개최]
화면 속에 익숙한 디지털 인플루언서가 등장했다.
"콘텐츠 정글 시대. 이제 영화는 죽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스크리너스는 믿습니다. 아직 당신의 영화는 끝나지 않았음을."
뭔 개소리를 하는 건지 의아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문구가 우리 셋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우승 상금 100억 원에 도전하세요! 그와 더불어 우승자에게 실사 영화 제작, 연출권과 함께 스크리너스 오리지널 영화 제작비 전액 지원을 약속드립니다.
"100억...?"
남 대표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진드기 청소기 3,333대를 살 수 있는 돈.
"AI로 만든 장편 필름. 100% 시청자의 투표로 결정합니다. 지금 도전하세요.“
”더불어 입선작 10인에게도 50억 상당의 현물과 제작비를 지원합니다.“
전광판 불빛이 어두운 편의점 앞을 붉게 물들였다. 100억. 그리고 '제작비 전액 지원'. 그 단어가 주는 비현실적인 무게감이, 취한 머리를 둔기로 때리는 것 같았다.
남 대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김 작가도 나를 봤다. 나도 그들을 봤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거 한 번 해볼까?"라든가 "우리가 세상을 뒤집자!" 같은 허세에 쩐 대사는 아예 나오지 않았다. 그저, 시궁창에 빠진 세 마리 짐승이 썩은 동아줄을 발견했을 때의... 살고 싶다는 본능적인 눈빛. 그거면 충분했다.
게다가 11편이면 혹시 우리 실력으로도 해볼 만하지 않을까?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