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역 뒷골목. 김 작가와 나는 무인 카페 구석에 앉아 로봇 팔이 윙윙거리며 타준, 영혼 없는 맛의 아메리카노를 홀짝이고 있었다. 약속 시간에서 벌써 40분이 지났다. 평소 시간 약속 하나는 칼 같은 남 대표 형이었다.
"작가님, 제가 전화 한번 해볼까요?"
"냅둬. 이 인간, 어제는 술김에 큰소리 뻥뻥 치더니, 자고 일어나서 현타 온 거지. 벤츠를 판다느니 100억을 번다느니... 솔직히 제정신이면 못 할 짓이잖아."
"아무래도 차 파는 데까지 같이 가줄 걸 그랬나 봐요. 혼자 울고 있는 거 아닌가..."
"모르지. 차 붙잡고 통곡하다가 딜러한테 쫓겨났을지도."
그때였다. 딸랑- 풍경 소리와 함께 카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남 대표였다. 땀을 뻘뻘 흘리는 얼굴이 마치 마라톤이라도 뛴 사람 같았다.
"아이고, 헉, 헉... 미안들 해. 생각보다 일 처리가 늦어져서."
"형, 무슨 일 있어? 안 오는 줄 알았잖아."
"혹시 마음 바뀐 거면 지금이라도 말해. 어제 우리가 텐션이 좀 과하긴 했어."
김 작가가 짐짓 쿨한 척 퇴로를 열어주자, 남 대표가 눈을 부릅떴다.
"뭔 소리야! 인간 남정식이, 뱉은 말 주워 담을 놈으로 보여? 벤츠는 진작 보냈어!"
"그럼 왜 늦은 건데?"
"회사 갔다 왔지. 그 놈의 청소기 때문에."
"엉? 청소기는 또 왜?"
"아니, 분실했다고 뻥치고 보험 처리 좀 해달라고 했거든? 근데 요즘 기계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냐? 그 안에 GPS. 관리팀 직원이 모니터를 딱 보여주는데, 내 청소기가 장례식장에 있었다는 동선이 다 뜨더라고! 파손 규정이 어쩌니, 변상이 어쩌니 하면서 지랄을 하는데..."
"그래서? 돈 물어줬어?"
"야, 내가 그걸 물어줄 돈이 어딨냐? 있다 해도 내가 줄 놈이냐?"
남 대표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직원 손 딱 잡고, 눈물 콧물 짰지. '선생님, 저도 집에 중학생 딸내미가 있습니다. 이거 물어내면 저 이번 달 생활비 빵꾸납니다. 사람 하나 살려주십시오.' 하면서 죽는 시늉 좀 했지. 그걸 옆에서 듣고 있던 관리부장이 그러더라고 자기도 기러기 아빠래. 결국 이번 건만 특별히 처리하기로 하고 넘어갔어."
나와 김 작가는 혀를 내둘렀다. 그랬다. 현장이란 늘 사고의 연속이다. 촬영 펑크 나고, 세트 태풍에 무너지고, 배우 도망가고. 남들은 "망했다"고 주저앉을 때, 이 형은 어떻게든 수습을 했다. 돈을 쥐어주든, 바짓가랑이를 잡든, 아니면 현란한 이빨(?)로 혼을 쏙 빼놓든. 그에게 '바퀴는 굴러야 한다'는 건 절대 명제였다. 시스템이 멈추라고 해도, 그는 기어코 기름칠을 해서 굴러가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대단하다 진짜. 그럼 차는? 돈은 받았어?"
내 질문에 남 대표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말도 마라. 나 오늘 진짜... 세상 바뀐 거 뼈저리게 느꼈다."
"왜? 딜러가 후려쳤어?"
"아니, 사람이 없어. 중고차 매장에 사람이 아예 없더라."
그는 허탈한 듯 설명했다. 예전처럼 딜러와 담배 한 대 피우며 "사장님, 차 상태 좋네~ 좀 더 쳐줘요" 하던 흥정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거대한 스캐너 터널을 통과하자, 3초 만에 엔진 상태부터 미세한 문콕 기스까지 데이터로 출력됐다. 그리고 AI가 산정한 '매입가'가 모니터에 떴다.
"758만원. 협상의 여지가 없더라. 그냥 '이 가격에 파시겠습니까? Yes or No' 끝이야. Yes 누르니까, 자율주행 렉카가 와서 내 차를 싣고 가버리대. 작별 인사도 못 했어. 18년을 탄 내 새끼를... 기계 놈이 짐짝처럼 들고 가버리더라."
남 대표가 울컥한 듯 커피를 들이켰다.
"그래서? 돈은?"
"그게 문제야. 입고 검수 끝나고 판매가 돼야 정산해 준대. 당연히 돈은 10원 한 푼 안 들어왔지."
"뭐야! 그럼 우리 빈털터리야?"
실망감이 옥탑방을 채우려던 찰나, 남 대표가 스마트폰을 꺼내 흔들었다.
"근데 우리 같이 급전 필요한 못난 백성들이 또 그렇게 많다는 거 아니냐. 키오스크에서 바로 대출회사로 연결 되는거야. '선지급 대출 서비스'란 게 있대. 차량 감정가의 70%를 먼저 땡겨주는 거."
"70%? 그나마 다행이네.”
“이자고 나발이고 일단 땡겼지!"
우여곡절 끝에 500만 원 남짓한 돈이 통장에 꽂혔다. 그날 저녁, 우리는 을지로 뒷골목의 허름한 삼겹살집에서 일명 <촬영 무사고를 기원하는 고사>를 지냈다. 돼지머리 고사상은 없지만, 삼겹살은 불판에 올려 놓고 우리의 미래를 간절히 빌었다.
고기도 지글지글 알맞게 익어가고, 소주잔이 몇 순배 돌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크으... 내 S-클래스... 옛날에 캐스팅 하느라고 매니져들 만나고 다닐 때, 청담동 이자카야 앞에서 딱! 내리고 발렛주차 아저씨한테 만원짜리 쥐어주면서 ‘기스 안 나게 잘 부탁드려요’ 그러면 가오 제대로 살았거든. 거기다 엉덩이가 착 감기는 그 맛이... 어지간한 여자 친구보다 그 녀석을 사랑했지..."
남 대표는 차를 떠나보낸 심정을 실연당한 남자처럼 읊조렸다. 인정머리 없는 AI 중고차 시스템을 안주 삼아 씹어대다가, 대화는 자연스럽게 옛날 촬영장 무용담으로, 그러다 다시 시나리오 아이템으로 널을 뛰었다.
"남 대표 근데 다 좋은데. 우리 베이스캠프는 어떻게 할 거야?"
김 작가가 상추쌈을 싸며 말했다.
"작가님 글도 써야 하고, 우리 제작 회의도 해야 하고. 컴퓨터도 놓으려면 사무실 하나 있어야지."
"맞아. 폼이 나야 배우 미팅도 하고 그러지. 그런데 보증금도 없으니 빈 사무실을 구하긴 그렇고"
남 대표가 기름 묻은 손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기다려봐. 내가 전화 좀 돌려볼게. 옛날에 내 덕 본 놈들이 한둘이냐? 요즘 남아돈대 사무실이. 책상 몇 개 못 빌려주겠어?"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어이 김 대표, 나야 남정식. 어, 별일 없고... 사무실 좀..." (뚜뚝) "여보세요? 훈식아? 오랜만. 나 정식이 형인데... 아, 회의 중이야?" (뚜뚝)
전화를 끊을 때마다 남 대표의 어깨가 조금씩 움츠러들었다. "그냥 와서 써"라며 내어주던 충무로의 인심은, 이제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다들 제 코가 석 자거나, 이미 바닥을 떠난 뒤였다.
"......어? 그럼~ 너무 좋지! 낼 바로 갈게요. 태훈이 형, 형?" (뚜뚝)
상대방이 바쁜지 전화는 끊어졌지만 10번째 통화 만에 남 대표의 표정이 밝아졌다.
”됐어! 해결! 태훈이 형이라고, 너 모르나? 옛날에 조명 감독 하던 양반인데 지금 크게 유통 사업 한대. 공간 널널하다고 언제든 오라네?" "오... 역시 남 대표. 죽지 않았어!"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부푼 꿈을 안고 남 대표가 말한 '현대 유통 주식회사'로 향했다. 상상 속의 사무실은 번듯한 지식산업센터 한 켠의 밝고 쾌적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자율주행 택시가 우리를 안내한 곳은, 서울 외곽의 거대한 농산물 도매시장이었다.
"근데...여기... 맞아?"
지게차가 굉음을 내며 지나가고, 양파망과 배추 더미가 산처럼 쌓여 있는 시장통. 경매사들의 고함 소리와 트럭의 클락션 소리가 귀를 때렸다. 땀 냄새, 흙 냄새, 그리고 썩은 배추 냄새가 진동했다.
"어이! 남피디 여기야!"
배추 더미 위에서 작업복을 입은 김태훈이 손을 흔들었다.
"왔어? 저기 창고 옆에 건물 하나 보이지? 외부 계단으로 올라가면 2층 비어 있으니까 맘대로 써. 책상은 내가 주워다 놨다."
그가 가리킨 곳은 양파 창고 옆 연녹색 샌드위치 패널로 지어진 2층 짜리 조립식 건물이었다.
"......"
우리는 말문이 막혔다. 디지털의 세상을 비웃듯 날것들이 넘쳐나는 방화 농수산물 시장. 삶의 체험 현장보다 더 치열하고 정신없는 이곳이, 막 100억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우리의 베이스캠프가 되려는 참이다. 아니 다른 선택지도 없다.
"하하... 야~~ 살아 있네. 삶의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냐? “리얼‘을 추구하는 우리 영화 컨셉하고도 딱이다, 딱이야."
남 대표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맹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는 짐을 챙겨 들고, 지게차를 피해 조립식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바퀴는 굴러야 한다. 비록 그 바퀴가 굴러가는 곳이 레드카펫 위가 아니라, 배추 잎 널린 흙 묻은 팔레트 위일지라도.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