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당근이죠?

by 배윤성

"어, 여보."

남 대표가 황급히 창고 구석으로 뛰어갔다. 목소리를 한 옥타브 낮게 깔았지만, 울려 퍼지는 통화 내용은 숨길 수가 없었다.

"돈? 아... 내가 안 보냈던가? 아니, 보낼 거야. 지금 지난달 작업료가 입금 처리 중이라는데 좀 늦네... 야,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어? 차 어딨냐고? 그거... 흥석이가 며칠 필요하대서 빌려줬어"

전화를 끊는 남 대표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는 한참 동안 벽을 보고 서 있다가, 마른세수를 하고 돌아왔다.

"제수씨?"

"어. 학원비 밀렸다고... 이번 달 넘기면 보내기 힘들다네."

남 대표가 쓴웃음을 지었다. S-클래스를 판 돈 500만 원. 그게 지금 통장에 있다. 당장이라도 보내주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 돈을 보내면? 우리의 '리부트' 프로젝트는 시작도 못 하고 좌초되는 거지 뭐.

"형. 그냥 형수한테 돈 보내. 가족이 우선이지"

"안 돼."

남 대표가 단호하게 잘랐다.

"이거 보내면 나, 다시는 시작 못할 것 같아. 장난 없거든? 그때까진... 내가 나쁜 가장 할란다."

그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가장의 무게를 견디는 방법은, 때로는 뻔뻔해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건사할 가족이 없는 내겐,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자, 장비 사러 가자. 돈 아껴야 되니까 새 거는 꿈도 꾸지 마."

우리는 스마트폰을 켰다. 용산 전자상가 대신, 우리 형편에 맞는 당근 앱을 켰다.


[매물 1: 초고사양 게이밍 PC (급처)] - 사양: RTX 3080, 램 64GB. 배틀그라운드 풀옵 가능. - 가격: 150만 원 (네고 사절) - 판매자: 입대예정자

"이거다. 이 정도면 작업 돌릴 수 있겠어."


우리는 즉시 '현대유통' 트럭을 몰고 접선 장소인 노량진역 3번 출구로 향했다. 판매자는 뽀얀 피부의 20대 청년이었다. 군대 가기 전 마지막으로 아끼던 애마를 파는 듯, PC 본체를 끌어안고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학생, 이거 진짜 잘 돌아가는 거 맞죠?"

남 대표가 본체를 두드리며 물었다.

"아저씨, 이거 제 영혼이에요. 코인 채굴 한 번도 안 돌린 순정이라고요."

"암요 암요. 그런데 우리가 이걸로 영화를 만들 건데, 나중에 대박 나면 학생 이름 엔딩 크레딧에 넣어줄게요. 그러니까 5만 원 네고 오케이?"

"아, 제가 판매글에 네고 없다고 써 놨잖아요. 아~ 괜히 나왔네."

청년이 정색하고 본체를 챙기려 하자, 남 대표가 다급하게 스마트 뱅킹을 열었다.

"오케이! 쿨거래! 150 콜!"

결국 10원 한 장 못 깎고 PC를 모셔왔다. 투명한 본체에서 비치는 아기자기한 메인보드와 부품들이 칙칙한 양파 트럭 안을 사이버네틱하게 바꿨다.


[매물 2: 65인치 UHD TV (벽걸이 포함)] - 상태: 화면 잘 나옴. 생활 기스 있음. - 가격: 20만 원 - 판매자: 황제 노래방 (폐업 정리)

"모니터는 이걸로 가자. 100인치는 못 사도, 65인치면 감지덕지지."

두 번째 행선지는 지하 노래방이었다. 폐업을 앞둔 사장님이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묵은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져가쇼. 리모컨은 여기 있고."

TV 상태를 확인하려 전원을 켰다. 화면은 쨍하게 잘 나왔다. 다만, 왼쪽 구석에 **[99점! 당신은 가수왕!]**이라는 잔상이 번인(Burn-in)으로 희미하게 박혀 있는 게 흠이었다.

"사장님, 저거 자국... 안 없어지나요?"

"그러니까 20만 원이지. 영화 볼 거라며? 어두운 장면 나오면 안 보여. 그냥 써요."

"......네."

우리는 군말 없이 TV를 떼어냈다. TV 뒷면에는 '황제 노래방 12호'라고 적힌 스티커가 초라하게 붙어 있었다.


다시 창고로 무사 귀환한 우리는 전리품들을 꺼내놓고 세팅을 시작했다. 짝짝이 책상 위에 휘황찬란한 LED가 번쩍이는 게이밍 PC. 벽에는 노래방에서 떼 온 65인치 TV. 그리고 바닥에는 인터넷 선을 끌어오기 위해 50미터짜리 랜선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자... 연결한다."

남 대표가 엄숙하게 전원 버튼을 눌렀다. 위이잉-! 경쾌한 팬 소리와 함께 PC가 부팅되었다. 노래방 TV 화면에 윈도우 로고가 뜨자, 우리는 마치 누리호 발사를 지켜보는 관제센터 직원들처럼 환호했다.

"됐다! 켜졌다!"

"와... 화면 크니까 좋네! '가수왕' 자국이 좀 거슬리긴 하지만."

남 대표가 맥주 캔을 따서 돌렸다.

"건배하자. 우리의 슈퍼컴퓨터 '알파고 1호'의 탄생을 위하여."

"알파고는 무슨... '당근 1호'지."

김 작가가 투덜거렸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비록 족보도 없고, 출신 성분도 제각각인 혼종 장비들이었지만, 이것들은 이제 우리의 무기였다.

"이제 무기는 생겼고."

내가 PC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렸다. 기계식 키보드의 찰칵찰칵 소리가 경매장의 소음을 뚫고 울려 퍼졌다.

"자..이제 저번에 못 본거 AI 영화나 계속 틀어봐. 잘 돌아가나"

쌩쌩해진 컴퓨터의 성능을 바탕으로 우리는 다시 신세계로 빠져들어 갔다.

그때, 남 대표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아내였다. 그는 이번엔 전화를 받지 않고, 카톡을 보냈다.

[여보, 미안해. 조금만 기다려줘. 내가 곧... 별 하나 따다 줄게.]

그는 핸드폰을 엎어두고, 우리를 보며 씨익 웃었다.

"뭐해? 다시 플레이. 장비값은 뽑아야지."

세 명의 중년들은 벽걸이 UHD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캔맥주 홀짝이는 소리만이 창고 사무실에 맴돌았다.


(다음 화에 계속)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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